동아일보에 내가 연재했던 소설로 ‘불의 나라’ ‘물의 나라’가 있다. ‘불의 나라’ 연재를 끝내고 곧 이어서 ‘물의 나라’를 연재한 걸로 보건대, 연재 당시 인기가 좋았던가 보다.
제목을 ‘불의 나라’라고 붙인 것에 대해 걸핏하면 자신을 소개할 때 ‘수원백씨 28대손’이라고 큰소리치는 주인공 백찬규의 말을 통해서 진술했던 논리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된다. 당시 독자들에게 ‘거시기’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백찬규는 말하기를, ‘특별시’의 1000만명 시민들은 너나없이 꽁무니에 불 하나씩을 매단 채 불 끌 생각은 안하고 뜨겁다 뜨겁다, 비명을 지르면서 내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무한경쟁 '불의 나라' 언제까지▼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어느덧 15년여가 지났는데 백찬규의 그 논리가 아직도 유효하니 한숨이 나온다. 이미지로 볼 때, 불은 솟아오르는 생명력과 아울러 전투력, 파괴력의 상징이다. 소지의 풍습이다. 향불을 피우는 것은 불의 신통력을 빌려 천상과 지상, 이승과 저승까지도 소통시키겠다는 것이고, 정월의 불놀이는 해충의 구제와 함께 악귀를 물리치려는 의식이며, 횃불을 높이 들어올리는 것은 전투력을 높이는 지금의 신호이다. 오행사상으로 보아도 불은 양(陽)이니 화승금(火勝金)이라 하여 쇠를 이길 뿐만 아니라 색깔로는 붉은색, 방향으로는 남쪽, 몸의 기관으로는 심장, 계절로는 여름을 상징한다. 잘 이용하면 따뜻한 것이 불이지만 잘못 다루면 재앙의 원천이다. 달리는 불길은 너무 빨라 잡을 수 없고, 한번 타고 말면 남는 것이 없어 황야가 되고 만다. 그래서 부처도 망집의 번뇌로 몸부림치는 우리들의 세상을 일컬어 화택(火宅)이라 했을 터이다. 화기(火氣)가 충천하는 세상이다.
어디 세상뿐이겠는가. 욕망이 끝없이 확대재생산되니, 아무리 더 부자가 돼도 남는 건 상대적 박탈감뿐이다. 어느 한 사람도 편안히 쉴 짬이 없다. 보통 사람이 보기엔 너무나 많은 걸 소유한 기득권층들도 자기들끼리 박 터지게 기세싸움, 불싸움을 하면서 왜 나만 양보하느냐, 왜 나만 손해보느냐 아우성 아우성이다. 가진 자든, 못 가진 자든 마찬가지다.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는 휴가조차 찾아먹지 못하고 산다. 휴가를 낼 수 없어서가 아니라 며칠 쉬는 짧은 사이에도 다른 경쟁자가 자신을 밀어낼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다. 모두들 횃불을 높이 들고 일터로 나가는 판이니 그야말로 ‘불의 나라’다.
무엇이 남을까. 이 불구덩이 경쟁의 가마솥에선 살아남을 생명이 없다. 가진 자, 못 가진 자와 높은 자, 낮은 자의 가름은 날로 더 깊어지지만 푸르게, 충만하게 살아남는 자는 하나도 없도록 돼가는 중이다. 민주화가 된대도 아무 소용없다. 독재자보다 더 무서운 독재자인 ‘자본’을 끝없이 좇아 우상화하면서 ‘경쟁’이라는 무서운 고문자에게 물고문 전기고문을 받다가, 마침내 우리 죽을 때까지 갇히고 말 욕망의 감옥을 떠올리면 숨이 막힌다. 이 숨막히는 불의 역사를 잡아줘야 할, 스스로 현실적인 메시아가 되겠다고 자처하는 그룹일수록 더 앞장서서 악쓰고 팔뚝 자랑하며 불난 집 부채질하고 앉았으니, 사람 환장할 일이다.
폐일언하고, 수승화(水勝火)다. 불길 속에서 우리를 구하려면 물이 와야 한다. 문학적으로 볼 때, 물은 정신적 심리적 원형이다. 생명은 물에서 발원하고 물로써 자라나니, 물은 창조력과 상상력과 풍요의 기틀이다. 낮은 데로 낮은 데로 흐르지만 거친 데는 부드럽게 넘고 깊은 데는 고요히 채우니, 돌멩이와 돌멩이 사이의 그늘에까지도 소외가 없다. 말하자면 물은 영원한 모성이자 여성성이다.
▼사랑 없으면 행복도 까마득▼
우리가 원하는 건 행복이다. 나 자신을 만나고, 내 어머니나 누이를 만나는 속도로 가지 않으면 사랑을 만날 겨를이 없고, 사랑을 만나지 못하면 너그러움도 없을 터이다. 내가 박탈감으로 악을 쓰면 남들도 악을 쓸 테니 충만은 먼 꿈에 불과하다.
돈이 많은들 어떻게 행복해지겠는가. 하늘에 아름다운 달이 떠도 내 마음의 우물이 고여 있지 않으면 볼 수 없다. 나는 내 아이들이 ‘불의 나라’가 아닌 ‘물의 나라’에서 사는 걸 보고 싶다. 그들의 영혼에 깊은 우물 하나씩 심어두고, 그 우물에 비쳐 보이는 달같이 이쁜 사람, 별처럼 빛나는 사람, 수없이 많아 존경하고, 좋아하고, 사랑하면서 사는 걸 보고 싶다. 지금은 새해, 2001년이다.
박범신(소설가·명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