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화백은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못배기는 체질의 화가다. 작업량도 많고 작품세계도 다양하다.
1992년 전작 도록을 만들 때 그의 작업량을 1만여점으로 추산했다. 작품세계도 인물·화조(花鳥)·산수(山水)는 물론, 사군자 도화(陶畵) 판화 삽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을 섭력한 전천후 작가다.
운보는 17세 때인 1930년 당대 화단의 1인자인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화숙에 들어가 1년만인 1931년 10회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 소녀 넷이 널뛰는 장면을 묘사한 ‘판상도무(板上跳舞)’로 입선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스승인 이당의 영향을 받아 인물화와 화조를 많이 그렸다. 작품에 새로운 전기를 맞은 것은 한국전쟁 때였다.
운보는 1951년 처가가 있는 군산으로 피난, 새로운 작업에 몰두했다. 처가의 헛간을 화실로 개조, ‘예수의 일생’이란 대업을 완수했다. 어려서부터 예배당에 다닌 운보는 예수를 한국 사람의 얼굴로, 한국식 복식으로 성경내용에 따라 29점을 완성했는데, 이 그림을 본 독일 신부가 예수의 부활이 빠졌다면서 1점을 더 그리라고 권해 ‘예수의 일생’은 30점 시리즈가 되었다.
우향은 그뒤 미국 유학시절 고생과 과로로 병을 얻어 1976년 1월2일 타계, 운보와의 부부생활을 마감했지만 운보에게는 ‘바보산수’라는 큰 선물을 남기고 떠났다.
운보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잊고자 작품제작에 열중해 그해 5월 남경화랑에서 ‘바보산수전’을 열었다.
‘바보산수’란 말도 운보가 지었지만 우리 민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낸 그의 독창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운보의 ‘바보산수’는 관념화가 판치던 조선시대에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만들어 낸 진경산수에 비길 만큼 미술사에 남는 큰 업적이다.
운보는 동양화단에서 맨 먼저 추상작업을 한 작가이기도 하다. 1965년 ‘태고의 이미지’ ‘청자의 이미지’ ‘심상의 이미지’를 발표, 동양화 추상의 프런티어로 각광받았다.
성화작업인 ‘예수의 일생’, 우리 민화를 새로운 그림으로 승화시킨 순진무구한 ‘바보산수’ 등 한국화에서 새 지평을 연 입체작업과 추상작업 등은 한국 미술이 세계성을 확보하는 발판이 되었다. 이른바 청록산수로 불리는 ‘청산도’, 문자를 형상화한 ‘자화미술’도 운보 예술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운보 예술을 논하면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듣고 싶은 욕망을 자신의 작품에 담아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청각장애의 한을 그림으로 풀어냈다는 얘기다.
1977년 ‘한국미술 유럽순회전’ 때 프랑스가 전시회 포스터 그림으로 뽑은 ‘새벽 종소리’가 그렇고, 1969년 뉴욕에서 제주 천제연 폭포를 생각하며 그렸다는 ‘수성동(水聲洞)’과 1943년에 그린 ‘아악(雅樂)’도 또한 그렇다.
이런 작품들은 운보가 소리에 대해 갖는,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같은 향수가 아닐까….
이규일(미술평론가·월간미술지 ‘아트 인 컬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