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카모토 신야 감독의 95년작 은 스토리를 나열하기가 퍽 얄궂은 영화다. 온갖 현란한 이미지의 향연으로 채워진 이 영화에서 줄거리는 오히려 부차적이다. 대신 츠카모토 신야 감독은 샤갈의 그림처럼 신비롭고 뭉크의 화풍처럼 거친 붓 놀림으로 인간 내면에 숨겨진 무의식의 세계에 말을 건다.
그가 바라보는 인간의 내면은 음습하다. 사랑이 말살된 자리엔 약육강식의 살벌한 싸움만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다. 열대 우림처럼 솟아오른 빌딩숲, 말을 잃어버린 사람들, 여기저기 흩뿌려진 약자(弱者)의 피와 시체, 그 안에 기생하는 무리들. 1000피스 짜리 퍼즐보다 더 복잡한 이미지의 조각들이 정신없이 스크린을 채웠다 금세 사라진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조그만 아파트에서 신혼생활을 즐기는 보험세일즈맨 츠다(츠카모토 신야)와 히즈루(카호리 후지) 부부. 이들의 삶에 츠다의 고등학교 후배 고지마(츠카모토 코지)가 끼여들면서 벌어지는 질투와 복수의 처절한 한 판 대결이 만화적 상상력으로 그려져 있다.
고지마는 현역 권투 선수로 활동중인 막강한 주먹의 소유자이며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살'을 가진 츠다와 여러 모로 대조적인 인물이다. 츠다는 힘 센 고지마에게 부인을 빼앗기게 될까봐 걱정하고 이런 우려는 곧 현실이 된다. 고지마는 "히즈루가 너무 부드러웠다"며 거짓말을 한 뒤 쉽게 선배의 부인을 빼앗고 츠다는 빼앗긴 부인을 되찾기 위해 권투를 배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힘의 세계는 정직하다. 물렁물렁한 살을 지닌 츠다는 고지마를 절대 이길 수 없으며 히즈루는 결국 '강자의 소유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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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에 휩싸인 히즈루가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마련한 방법은 자신을 더욱 학대하는 것. 온 몸에 피어싱을 늘려가는 히즈루와 그녀를 사이에 두고 주먹질을 해대는 두 남자는 모두 이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애쓰는 헐벗은 사람들이다.
등을 연출했던 츠카모토 신야 감독은 이 영화에서 아주 기괴한 방식으로 '도시의 법칙'을 분석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도시는 '더 높이, 더 강하게'를 외치며 뻗어나가는 철저한 '힘의 피라미드'다. 도시는 사각의 링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법칙 또한 그대로 적용된다.
츠카모토 신야 감독은 이 정글 같은 세상의 단면을 보여주기 위해 고층 빌딩을 자주 부감으로 보여주고 고양이 시체를 파먹는 구더기의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비춘다. 구역질 나는 장면이라고 넌더리를 칠지라도 사실은 이게 진짜 이 도시의 단면이라는 데에 이견을 달긴 어렵다.
그래서 은 어쩔 수 없이 불편한 영화다. 그건 이 시대의 환부를 정곡으로 찌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엽기적인 장면들을 군데군데 박아놓았기 때문이기도 하며 장르의 법칙을 완곡히 거스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츠카모토 신야가 감독, 각본, 촬영, 편집, 주연, 제작을 혼자 도맡은 이 영화는 편집이나 카메라의 움직임이 절대 유려하지 않다. 화면은 자꾸 흔들리고 신과 신 사이는 튀기 일쑤다. 자주 비춰지는 빌딩 신은 어지럽고 선혈 낭자한 피는 비릿하며 구더기 장면에선 눈이 감기고 가슴을 피어싱으로 잡아끄는 장면에선 욕지거리가 나온다.
츠카모토 신야가 보여주는 이 현란한 폭력에 87분 간 시달리고 나면 어쩔 수 없이 '폭력의 해독제'가 될 그 무엇을 긴급수혈하고 싶어질 것이다. 이 영화는 그만큼 인간의 인내력을 실험하는 무지막지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츠다의 라이벌로 등장한 고지마 역은 츠카모도 신야 감독의 친동생인 츠카모토 코지가 맡았으며 두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히즈루 역은 이와이 순지 감독의 에 출연했던 카호리 후지가 맡아 열연했다. 96년 브뤼셀 판타스틱 영화제 특별상 수상작. 2월3일 개봉.
황희연benotb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