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가 하늘에서 떨어진다. 물리학적으로는 중력을 이기지 못한 사물의 운동이겠지만 일단 카메라가 '추락하는 것'을 뷰파인더 안에 잡으면 그것은 의미심장하거나 미스터리한 '사건'이 된다.
가장 신비로운 '추락 이미지' 중 하나는 번지점프다. 떨어지긴 하지만 바닥에 닿지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은 줄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허공 속으로 뛰어든다. (An American Werewolf in Paris, 97)의 장난기 가득한 미국인 관광객들도 그들 중 하나다. 한밤중 에펠탑에서 떨어지는 기분은 어떨까? 하지만 그들보다 먼저 추락하는 여인이 있었으니… 아뿔싸! 그녀에겐 줄이 없었고 그들은 뒤늦게 뛰어내려 그녀를 죽음에서 건진다(과학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장면이다). 의 추락은 남녀 주인공의 낭만적 결속을 드러내는데 마지막 그들은 결혼기념 번지점프를 하며 영화를 끝맺는다.
(2001)는 제목에서부터 강한 추락의 냄새를 풍긴다. 수많은 비밀과 소문 속에서 개봉(2월3일)을 기다리고 있는 이 영화의 번지점프 의미는 '운명'이다. 첫사랑의 날카로운 입맞춤을 잊지 못하는 한 남자 앞에 '영혼의 파트너'가 나타난다. 하지만 그는 반갑기보다는 오히려 당황스럽다. 이룰 수 없는 사랑? 그들은 번지점프로 사랑을 이루지만 그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이렇게 두리뭉실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건 아직 개봉 전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화 보는 재미를 빼앗고 싶진 않습니다).
"아직까지는 괜찮아, 아직까지는 괜찮아…." (La Haine, 95)의 프랑스 외곽에 사는 '양아치'들은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살아간다. 밥 말리의 레게 음악과 화염병, 진압경찰로 시작하는 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생각한다. 주인공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느낌? 그건 바로 지구를 향해 떨어지면서도 "아직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런 느낌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 비하면 (Lethal Weapon, 87)의 미치광이 형사는 차라리 속 편한 '추락자'다. 마약 기운에 절어있는 한 여자가 고층건물에서 떨어지며 시작되는 의 추락장면은 광기의 이미지다. 범인보다 더 미쳐 있는 '광인 경찰' 멜 깁슨은 고층건물 위에서 시위하고 있는 범인에게 서서히 다가간다. 그리곤 "차라리 같이 떨어져 버리자"며 범인을 안고 투신한다. 안전장치가 있어 생명엔 지장이 없었지만 너무 놀란 범인은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며 항의한다.
한국영화의 추락 이미지는 (75)에서 시작되는데 '하얀 고래 한 마리'를 잡으려 떠났던 한 젊은이는 '박통 시대'의 답답한 분위기 속에서 벼랑 밑으로 몸을 던진다. (84) 첫 장면에 등장하는 영화감독(이장호 감독이 직접 출연)은 어떤가? 활동사진의 실종위기를 맞은 80년대, 그는 옥상 위에서 떨어져 자살한다. (89)의 만수도 시대의 억압에 못이겨 추락을 택했던 사내다. 옥상 위에서 페인트칠을 하고 있는 그들을 사회 불순 세력으로 오인한 경찰은 기어이 만수를 빌딩 아래로 떨어뜨리고 만다. 그렇게 보면 (95) 마지막 장면에서 손을 잡고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지던 그녀들의 굳센 연대감은 꽤 희망적이다. 이쯤에서 (Thelma & Louise, 91)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날 테지만, 그들은 추락했다기보다 차라리 승천한 게 아닐까 싶다.
반드시 사람들만 떨어지는 건 아니다. (Gods must be Crazy)의 콜라 병 하나는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고, (Siam Sunset, 99)의 공중에서 떨어진 냉장고는 한 남자를 불행으로 몰아넣었다. (The Truman Show, 98) 도입부에서 떨어진 조명기는 트루먼이 살고 있는 세계가 모두 가짜임을 희미하게 나마 암시해주었다. 가장 인상적인 '떨어지는 사물'은 (My Own Private Idaho, 91)의 리버 피닉스 기억 속에 있던 집 한 채. 언제나 떠돌며 갑자기 길 위에 잠들어 버리는 '기면발작증' 환자 피닉스에게 공중에서 '쿵'하고 떨어지는 집에 대한 기억은 찾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향수다.
수많은 추락의 이미지가 있지만 히치콕의 (Vertigo, 58)만큼 아득한 심연을 연상케하는 영화도 드물다. 고소공포증, 악몽, 강박관념, 욕망, 죄의식, 그리고 종탑에서의 투신. 한참 전성기에 있던 히치콕은 이 영화에서 이 모든 것을 완벽한 순환구조에 몰아넣고 냉전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주의로 가득 찼던 당대 미국사회를 수수께끼 같은 영화 한 편으로 빚어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남자는 여자를 구하는 데 또 다시 실패하고 주디/마들렌은 저 아래로 떨어진다. 아마도 그는 오늘밤 또 다시 악몽에 시달리며 추락의 이미지들로 가위눌릴 것이다.
김형석(영화칼럼리스트)woody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