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고향을 찾았다가 풀썩 웃음을 터뜨렸다. 터미널에서였다. 어린 시절 아련한 추억이 느닷없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설 무렵 밤 기차를 타고 새벽 고향역에 도착하면 온 들에 눈이 가득차 있곤 했다. 시린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종종걸음으로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가면 건장한 청년들이 악을 쓰듯 외치는 모습과 마주쳤다.
“즈업 고어∼.” “지아 장가∼.”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를, 노래같기도 한 외침을 신기하게 듣고 서 있노라면 어른들은 서둘러 내 손을 잡아끌었다. “무슨 소리예요?” 호기심에 잇달아 캐물어도 어른들은 말해 주지 않았다. 어쩌면 대답해 주었으나 내 기억에서 지워졌는지도 모른다.
▼곳곳에 스민 문학적 자존심▼
한참 지나 고등학생 무렵에야 알았다. “정읍 고창 가요” “진안 장수 가요”라며 행선지를 외치는 거였다. 아아 고창이라니, 화사집과 동천 그리고 신라초를 써 유명한 그 미당 서정주가 태어난 곳이 고창 아니던가. 그와 한 울타리에 있다는 기쁨으로 공연히 내가 시인이 된 듯 자랑스럽고, 그래서 고향은 더욱 아름다운 곳으로 내 기억의 곳간에 자리잡았다.
비슷한 얘기를 작가 박완서선생의 글에서 읽었다. 1970년대 하동에 갔을 때 터미널에서 차장들이 “으악 으악”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으악이라는 지명도 다 있나 싶어 귀를 곧추세워 들어봐도 여전히 으악이었다. 치미는 궁금증을 떨칠 수 없어 조심스럽게 “으악이 어디유?”라고 물어 보았다나.
그러자 차장은 ‘생활에 지친 표정에 문득 섬광같은 긍지가 스치더니’ 씹어뱉듯이 말했다는 것이다. “아아, 토지에 나오는 악양도 몰라요.” 그리고 이런 사람은 무시해 버려도 싸다는 듯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으악은 대하소설 토지의 출발점 평사리가 있는 곳, 바로 경남 하동군 악양면이었던 것이다. 청년이 ‘씹어뱉듯’ 말한 걸 들었을 때의 가슴떨림을 작가는 이렇게 적었다. “어떤 문학이 그 문학을 낳은 땅의 구석구석 이름없는 촌부의 마음 속에까지 드높은 자존심을 심어 줄 수 있다면 그건 얼마나 굉장한, 전율스럽기조차 한 일인가.”
우리 땅 어느 곳인들 문학적 자존심이 깃들지 않은 곳이 없다. 강원도는 메밀꽃이 밤을 하얗게 밝혀 주는 봉평이 있어 자랑스럽다. 백담사 골짜기에 내려앉은 님의 침묵도 고즈넉하다. 충청도는 굽이굽이 금강이 역사를 아로새기며 흘러 민심을 어루만진다. 당진엔 상록수의 혼도 찬연히 남아 있다. 임꺽정이 의형제를 맺었다는 안성 칠장사는 어떤가. 경기도의 탁 트인 넓은 가슴을 만나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우리의 고향들이, 문학 속에 살아 숨쉬는 땅들이 언제부턴가 서로 헐뜯고 배척하는 온기없는 땅으로 변해 가고 있다. 정치 때문이다. 신문들은 이른바 설 민심을 전하며 경상도와 전라도가 다르고 충청도도 같지 않다고 분석한다. 똑같이 흉흉하긴 하되 지역따라 정치 현안에 대한 시각이 판이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국회의원들은 한술 더 떠 ‘적대 지역’을 설정해 주고 그곳 정치인들이 엉망으로 정치를 해 나라가 흔들린다고 부풀린다.
자기가 속한 땅 (그건 분명히 한국인데도) 이외의 지역과 그곳 사람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낳은 땅 구석구석 이름없는 촌부의 마음 속에까지’ 내 땅에 대한 비틀린 편애와 연민을 심어 주고 모든 잘못은 남의 땅에 있다고 되쳐야만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민초들의 마음에 턱없이 편향된 분노와 증오를 심어 주어 민심을 서로 등돌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지역분열 부추기기 언제까지▼
우리를 감동시킨 어떤 문학이 다른 지역을 헐뜯고 비방함으로써 내 땅에 대한 자존심을 드높인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악양면 평사리를 내세우려고 섬진강 너머 전라도를 깎아내린 일이 있었던가. 미당이 경상도를 불쾌한 대상으로 그렸다면 그의 시가 우리의 가슴에 달려드는 느낌을 줄 수 있었을까. 불과 몇 년을 하는 정치에 매달리느라 끝없이 이어 전해 줄 고향의 자존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겨 놓는 행위를 우리는 언제까지 용인할 것이며 덩달아 흥분할 것인가.
설에 고향을 찾았으니 주말엔 정치에 오염된 마음을 씻는 여행을 해보고 싶다. 으악이 악양이라는 걸 가슴으로 느껴 보고, 나부터 좁아 터진 내땅주의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해봐야겠다.
민병욱min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