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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장편소설 '적들의 사랑~' 작가 원재길 인터뷰

입력 | 2001-01-29 18:40:00


“정절(情節)이란 한 번 사람을 믿고 사랑하기로 작정했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백 년이나 천 년의 세월이 흘러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것이죠.”

소설가 원재길씨(42)는 최근 펴낸 장편소설 ‘적들의 사랑 이야기’(민음사)의 주제를 변치 않는 믿음이라고 말했다.

이 책은 남녀 두 쌍의 애증 관계를 통해 한민족사를 다룬 욕망의 대서사시 같은 작품. 5개의 에피소드에서 이름을 바꿔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위해 수 백년간의 고독을 견딘다.

“에로티시즘과 우리 역사가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해 쓰고 싶었어요. 이를 통해 수 천년 우리 역사를 관통하는 지배와 소유, 파괴와 창조, 불멸과 번식의 욕망의 밑그림을 그려보고자 했지요.”

작가의 야심에 의해 한민족사는 ‘추행시대’ ‘화간시대’ ‘사통시대’ ‘동거시대’ ‘별거시대’라는 새로운 시대명을 얻는다. 철저하게 상상력으로만 재구성된 신화적 공간이 황당하지만은 않은 것은 역사적 사실과의 정교한 줄타기 때문.

“마무리 작업을 했던 지난 3년간 100권의 책을 뒤졌습니다. 각 시대별 생활상과 복식, 음식, 토종과 외래종 유입시기 등을 면밀히 조사했죠.”

각주의 형태로 소설에 개입하는 작가의 재담에서는 연세문학회 동기인 재담꾼 성석제와 차별되는 재기가 돋보인다.

다섯 번째 이야기 ‘별거시대’에서 의처증에 사로잡힌 희련의 남편 황만에 고용되어 희련과 몽환의 수 백년만의 해우를 감시하다 차 안에서 담배 불을 반짝이는 킬러에 대해 그는 이런 해설을 넣는다.

‘킬러로서의 자격이 전혀 없는 자이거나 자만심이 지나친 자이다. 킬러들의 교본엔 임무수행 중 절대 삼가야할 것으로 열 가지가 적혀 있다. 하품, 잡담, 방귀, 오줌, 똥, 전화, 몽상, 음식, 딸꾹질, 그리고 담배’.

매 작품마다 재기발랄함이 돋보이지만 원씨의 문제의식은 늘 진지하다.

“변하지 않는 사랑을 그린 것은 인간관계를 급속도로 변질시키는 ‘문명의 속도’에 대한 제 나름의 반항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일이지만 이를 부여잡아야 하는 것은 거기서 믿음과 신뢰를 발견하기 때문이지요.”

그에게 정절이란 곧 자신과 맺은 약속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이 신화의 옷을 입힌 철저한 허구의 세계에서 구체화된 것은 곧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역설적 표현인 셈.

강퍅한 현실을 직설적으로 쏘아붙이기보다는 에돌아 되받아치는 전술을 고집해온 그에 대해 시인 고은은 “사물의 앞보다 사물 너머에 있을 무엇인가를 보는 작가”라고 평한다.

diga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