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이형기의 ‘낙화’ 중에서)
사랑하지만 떠나간다는 ‘위대한 거짓말’을 위한 시가 아니다. ‘운명적인 만남’도 어렵지만 ‘아름다운 이별’은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시다. 앞모습은 어느 정도 속일 수 있다. 꾸밀 수 있으니까.
그러나 뒷모습은 그 ‘본색’을 감추기가 어렵다. 잘 꾸며지지 않으니까. 사람의 눈이 앞에 달린 것은 자신의 그럴듯한 앞모습보다 남들의 그런 적나라한 뒷모습을 더 잘 보라는 암시는 아닐까.
▼빈손으로 떠난 정문술 사장▼
그래서인지 ‘아름다운 은퇴’라는 말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진정한 벤처기업인 1호’로 유명했던 미래산업 정문술사장이 전격적으로 은퇴했다. 자신이 ‘맨손’으로 일궈낸 사업을 두고 ‘빈손’으로 떠나겠다는 것이었다. 많이 가져본 사람은 안다. 많으니까 더 남에게 주기 아깝다는 것을. 더욱이 자식에게 물려주지 ‘못하기’보다 ‘않기’가 얼마나 더 어려운가.
20일에 있었던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는 ‘오는’ 조지 W 부시보다 ‘가는’ 빌 클린턴에게 눈들이 더 쏠렸었나 보다. 주인공이 따로 있는 ‘그림자 취임식’이었다니까. 클린턴은 ‘부적절한’ 성관계를 맺은 ‘부도덕한’ 대통령이었다. 그런데도 지난 반세기 동안 퇴임한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높은 지지도를 남기고 물러났다. 아무리 최장기 경제 호황을 누리게 해준 덕이라지만 그 비법이 신기할 뿐이다. 그런 그의 옆에는 패자의 뒷모습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림처럼’ 보여준 앨 고어가 서 있었다.
하지만 낙타가 바늘을 뚫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인가 보다. 다시 초라한 ‘좀도둑’이 된 ‘대도(大盜)’ 조세형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는 왜 건강한 시민이나 독실한 신앙인, 행복한 가장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을까. 그 동기야 알 수 없지만 감동적이었던 그의 뒷모습을 다시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뒷모습은 ‘뒷모습 이후’로 완성되는 것이니까.
얼마 전에 열린 제58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는 줄리아 로버츠가 ‘에린 브로코비치’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영화에 카메오로 잠깐 출연하기도 한 실제의 에린은 환경을 오염시킨 대기업을 상대로 사상 최대의 손해배상액을 받아냈다. 정의의 승리요 여성성의 개가(凱歌)였다. 그러나 이런 ‘영화’와는 달리 ‘실화’에서는 그녀나 변호사와의 친분관계에 따라 배상금이 불공정하게 배분됐다는 항의를 받았단다. 그리고 그 영광을 혼자 누리느라 분노한 주민들을 만나주지도 않았다니, 주민들에게 에린의 뒷모습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뒤를 돌아보는 것과 뒷모습을 보이는 것은 다르다. 뒤를 돌아보면 다시 앞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반면 뒷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앞서 걸어야 한다. 미련이나 집착, 욕망이 인간을 뒤돌아보게 한다.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한 뒷모습을 자꾸 숨기게 만든다. 하지만 관용과 자유, 무소유는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그래서 그 근사한 뒷모습을 자꾸 보게 만든다.
만날 때 헤어질 것을 염려하는 연인들이 없는 것처럼 물러나기 위해 전진하는 인간도 없다. 그래서 박수를 받을 때 떠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박수는 남이 쳐주는 것이고, 자신의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보고 쳐주는 것이다. 자신의 뒷모습은 스스로 볼 수 없고, 뒷거울이나 남의 눈이 있어야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앞모습보다 뒷모습을 책임지기가 더 어려운 이유이다.
▼남의 뒷모습에서 자신을 봐야▼
영화 ‘와호장룡’의 아름다운 마지막 장면에서 용(장쯔이)은 안개 바다 속으로 ‘낙화(落花)’처럼 사라진다. 모두를 적으로 삼으면서 자신의 앞모습만 내세우던 ‘대결’의 자세를 버린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버려야지만 다시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 용의 그런 뒷모습에 자꾸 앞모습조차 추한 요즘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뒷모습이 겹쳐지는 것은 단지 나뿐일까. 그들은 남의 아름다운 뒷모습이 자신의 뒷거울이 될 수도 있음을 모르는 듯하다.
김미현(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