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초 우리나라는 미국과의 통상 분쟁으로 나라 경제가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였었다. 미국이 불공정거래로 무역 흑자를 내는 나라를 골라 우선협상대상국(PFC)으로 지정하고 무자비한 보복을 취하겠다는 이른바 공포의 슈퍼301조를 내놓았던 것이다. 그 당시 한국은 미국에 대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무역 흑자를 많이 내고 있었기 때문에 PFC에 지정될 가능성이 그 어느 나라보다 높았다. 국가 경제에서 수출의존도가 지금보다 훨씬 높았던 우리 국민은 그래서 목에 마른침을 넘기면서 초조한 나날을 보내야 했었다.
그 때의 에피소드 한 토막. 한미통상협상을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당시 상공부장관(한승수·韓昇洙)은 그러나 산더미 같은 협상 자료를 덮어둔 채 어느 서양화가의 그림책에 몰두해 수행원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알려진 얘기지만 그 화가는 바로 협상 파트너인 미국 무역대표부(USTR) 칼라힐스 대표의 할아버지였다. 한장관은 워싱턴에서 칼라힐스를 첫 대면하던 날 그녀 할아버지의 작품을 화두로 협상을 풀어 나갔고 자긍심에 취한 칼라힐스는 회담 내내 ‘이례적으로 호의적이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보도했다.
▼한미통상마찰은 이미 시작됐다▼
오랜 협상의 결과 우리나라는 슈퍼301조 대상에서 제외됐고 무사할 것으로 전망되던 일본은 엉뚱하게도 그 대상에 포함됐다. 일본 정부가 발칵 뒤집힌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 나라 관리들을 더욱 부끄럽게 만든 것은 일본 언론의 보도였다. 어느 유력 신문은 머릿기사로 ‘일본 관리들은 대미협상에서 한국을 배우라’며 우리 대표단의 칼라힐스 ‘다루는 법’을 상세히 소개했던 것이다.
옛날 이야기를 장황하게 소개한 것은 이유가 있다. 12년전 부시전대통령 취임 직후 일어났던 한미통상 마찰이 바로 오늘날 그 아들이 대통령에 들어서면서 똑같이 재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로버트 죌릭 USTR대표 지명자가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현대전자에 대한 한국 정부의 구제 조치가 세계무역기구의 규정을 위반한 것으로 강력한 압력을 가하겠다”고 거침없이 답변한 것은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텍사스의 태양이 얼마나 뜨거울지를 보여준다.
부시대통령은 할아버지가 상원의원을 지냈고 아버지는 대통령이었던 정치 명문 출신으로 르윈스키와 염문을 뿌렸던 클린턴전대통령과는 출신부터 다르고 도덕적 기준도 다르다. 그가 백악관에서 청바지를 입지 못하도록 한 것은 사소한 것 같아 보이지만 워싱턴 바닥에서클린턴 스타일을 확실히 제거하겠다는의지로 해석해야 한다. 그런 분위기에서 하나둘씩 나오고 있는 것이 최근 대북(對北)문제나 한미통상문제와 관련된 일련의 발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미국 경제는 바야흐로 급속히 악화되는 시대에 들어섰다. 신경제가 선사한 호황의 산이 높았던 만큼 불황의 골도 깊을 것이라는 걱정은 워싱턴의 부담이다. 이럴 때 부시행정부의 선택은 미국 경제를 어렵게 하는 대상자 하나를 밖에서 골라 국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희생양을 만드는 일일 수도 있다. 그 대상으로 우리나라가 선택된다면 논리적인 대응은 불가능하다. 통상 협상에서는 분명히 약자와 강자가 있기 때문이다.
“왜 현대전자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거론하면서 한편으로는 미국 AIG컨소시엄이 현대투신에 투자할 테니까 한국 정부도 출자하라는 이율배반적인 주문을 하느냐”는 불평은 맞는 말이지만 통상 문제에 관한 한 저들을 논리적으로 굴복시킬 묘약은 못된다. 미국은 12년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고 보수로 무장한 국익 제일주의는 기존의 국가간 우호 관계를 언제든지 뒤로 밀쳐낼 수 있다. 그래서 지금 한미관계, 특히 두 나라간 통상관계는 대단히 예민한 시점을 맞고 있다.
▼열정-능력갖춘 전문가는 떠나고▼
불행하게도 여러 각도로 타진을 해보았지만 우리 정부안에 12년전 통상 분쟁을 해결할 때의 열정과 능력, 인물을 다시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부 조직이 바뀌어 통상 업무가 외교통상부로 넘어가면서 정부내 통상 전문가들은 몽땅 자리를 떠났고 당국자들의 분위기는 아직도 클린턴 시절의 달콤한 밀월감에 도취되어 있는 듯하다.
대안이 시원치 않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경제정책을 국제통상 규범의 범위안에서 집행하는 일 뿐이다. 그러나 작금의 경제팀이 내놓는 정책들을 보면 통상 규범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해 준다. 이래저래 경제 걱정이 더 커지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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