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엄마→할아버지→엄마→….’다섯 살배기 수진이(5·경기 안산시 고잔동)를 맡는 순서다. 매주 월, 금요일에는 서울 동작구에 사는 외할머니가, 수요일에는 서울 영등포구에 사는 할아버지가 와서 수진이를 돌본다. 돌볼 사람이 없는 화, 목요일은 자영업을 하는 수진이 어머니 김민경씨(35)가 일을 일찍 끝낸다. 김씨는 “아이 키우기는 물론 일도 제대로 못하는 것 같고 양가 부모님 신세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불편하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5살짜리 딸을 시댁에 맡긴 회사원 이모씨(33·여)는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딸이 처음 부른 노래가 시아버지가 즐겨듣는 ‘뽕짝’이었을 때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는 것.
아이는 아이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맞벌이 가정의 어려움이 나날이 깊어가고 있다. ‘아이 낳기 겁난다’는 말조차 공공연하다. 생계와 고학력 여성의 자아실현을 위해 맞벌이 가정은 크게 늘었으나 턱없이 허술한 ‘사회적 육아시스템’ 때문에 맞벌이 부부, 특히 여성의 어깨가 한없이 무거워 가고 있는 것이다.
▽유랑하는 아이들〓맞벌이 하는 회사원 이모씨(29)는 최근 2살과 5개월된 두 아들을 인천 친정에서 충주의 시댁으로 옮겼다. 1년 넘게 아이들을 돌봐 온 친정어머니가 어깨 통증으로 더 이상 이 일을 맡을 수 없게 된 것.
주말마다 시댁을 찾는 이씨는 “시어머니가 흔쾌히 맡아주어 고마우면서도 아이들을 직접 못 기르는 괴로움과 노부모에 대한 죄스러움이 교차한다”고 말했다.
맞벌이 가정의 취학전 육아는 계층별로 다소 차이가 있으나 노부모 등 가족에 의지하는 경우가 반수 이상.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김승권(金勝權)박사팀의 연구에 따르면 지난해 2세 이하의 영아가 있는 맞벌이 가정 가운데 가족 도움을 받는 비율이 연령대별로 45.2∼68.7%에 이르렀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가는 연령대(3∼5세)에서도 그 비율은 20.5%였다. ‘가족의 도움 없는 육아는 불가능하다’는 게 입증된 셈.김박사는 “피붙이에게 맡여야 마음이 놓인다는 정서가 지배적인데다 영아를 맡길 시설은 사실상 거의 없다”면서 “파출부 등 대리모에게 영아를 맡기는 비율은 1%대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글 싣는 순서▼
- 조기교육에 멍드는 아이들
- 조기교육 찬반 논쟁
- 맞벌이 부부의 육아 고민
- 가정교육의 실종과 왜곡
- "맡아만 줘도 고마워요."
- 끝없는 논란 '보육 vs 보육'
- 손 놓고 있는 국가
▽가족과의 갈등, 부모의 자괴감〓이같은 추세는 새로운 문제를 불러온다.
‘육아의 주도권’을 둘러싼 가족간 갈등, 육아에서 소외된 젊은 부부들의 자괴심, 노부모와 아이에 대한 미안함 등이 양육비 걱정과… 아울러 맞벌이 부부들을 짓누르는 것.
세살배기 딸을 시댁에 맡긴 김모씨(32)는 “노부모가 응석을 받아줘 아이가 점점 이기적으로 되는 것 같다”면서 “맡아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일일이 참견할 수도 없고…”라고 털어놨다.
돌 지난 아들을 친정에 맡긴 공기업 직원 김모씨(30)도 “며칠전 아이 재우는 방법 등 사소한 문제로 어머니와 다퉜다”면서 “이따금 아이를 극성맞게 키우는 전업주부들 얘기를 들을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다”고 털어놓았다.
그 후유증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한국교육개발원 유아교육팀 나정(羅靜)박사는 “출산휴가를 마치고 직장에 복귀한 여성들이 우울증을 호소하곤 한다”며 “이는 대개 아이를 직접 기르지 못한다는 죄책감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당신만 아이 기르나?”〓그러나 아이를 직접 기를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그를 이유로 정시퇴근이나 조퇴, 혹은 결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
3년 넘게 시댁에 맡겨뒀던 아들(5)을 지난해 초 데려온 김모씨(34·교사)는 지난 한해 동안 4차례나 조퇴했다. 출퇴근길에 아이를 유치원에 맡기고 찾아오곤 했는데 아이가 아프거나 유치원이 쉬는 등 불가피한 상황이 간간이 벌어졌기 때문.
김씨는 “일단 같은 또래 자녀를 둔 이웃에게 부탁해보고 여의치 않으면 조퇴했다”며 “동료 선생님들께 눈치가 보인다”고 말했다.
퇴근시간이 들쭉날쭉할 경우는 거의 극한상황.
증권사에 다니던 박모씨(32)는 지난 3년간 매일 오후 5시면 딸을 누가 어린이집에서 데려올 수 있는지를 놓고 남편과 통화해야 했다. 그는 결국 지난해 직장을 포기했다.
박씨는 당시 상황을 상기하며 “직장에서 ‘아이 탓’을 할라치면 담박 ‘너만 아이 키우냐’는 비아냥이 돌아오는 게 우리 풍토 아니냐”고 되물었다.
어머니가 취업중인 영·유아의 연령별 보육유형
주 양육자
0세
1세
2세
3∼5세
어머니
28
24.6
15.4
14
가족
43.3
39.6
26.1
5.7
어머니+가족
24.7
16.7
10.9
2.8
가족+시설
0.7
0.8
8.2
12
시설
2
13.5
24
37.9
어머니+시설
1.3
3.2
14.9
23.7
2종 이상 시설
0
0
0
3.5
없음
0
1.6
0.5
0.4
▽대안은 없나〓유감스럽지만 이같은 맞벌이 부부의 고충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은 없다. 우리 사회의 보육시스템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 많은 젊은 부모들이 아이 맡기기를 원하나 보육시설의 양이 터무니없이 적은데다 그 수준도 기대치 이하다.
그러나 완충할 수 있는 길은 있다. 그동안 사실상 유명무실했던 육아휴직제가 하나의 방안. 99년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조사대상 1732개 기업 가운데 육아휴직이 한차례 이상 실시된 곳은 40개소(2.3%)뿐이었다. 무급 휴가인데다 복직의 불투명 등으로 신청을 기피했던 것. 이에 따라 지난해 말 여야 국회의원들은 육아휴직 중 임금의 30%를 제공하고 복직을 보장하는 내용의 법개정안을 마련, 현재 계류중이다. “육아휴직제는 우수 여성인력의 확보를 통해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 향상에도 큰 힘이 되므로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분위기가 돼야 한다”는 게 한국여성개발원 김엘림수석연구위원의 설명.
여성계는 선진 외국에서 육아휴직의 변형된 형태로 활용되는 단축근로시간제나 시차제근무, 노동시간변경 등 다양한 제도를 운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듣기에 따라선 여성계의 관련 주장들이 ‘지나친 것’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2세를 길러내는 문제와 여성인력의 적극적 활용은 이제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기에 함께 고민할 문제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 보육사업 9년 '외화내빈' ▼
이 땅의 거의 모든 주부들에게 ‘탁아(託兒)’는 이제 남의 일이 아니다.
맞벌이 부부는 맞벌이 부부대로, 전업주부는 또 그들 나름으로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겨야 할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도 여러 가지다. 단순히 낮시간에 아이를 돌봐줄 손길이 필요해서 그럴 수도 있고 아이들에게 ‘또래 집단’을 찾아주거나 ‘전문화된 아동교육’을 베풀기 위해 ‘탁아시설’에 맡겨지기도 한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애들이나 가는 곳’이라는 식의 옛 관념은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
‘탁아’라는 용어가 쓰이던 자리에는 어느덧 보다 고급스런 ‘보육’이라는 개념이 자리잡았다. ‘어린이집’ ‘놀이방’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생활 주변에 자리잡은 ‘보육산업’은 단기간에 눈부시게 발전했다.
영육아보육법 제정 직후 4513개소에 12만3297명의 아동이 이용하던 보육시설은 채 10년이 지나지 않은 지난해 1만9320여소에 68만2300명의 아동이 생활하는 곳으로 발전한 것.
시설수로는 4.28배, 아동수로는 5.53배나 된다. 3∼5세 유아의 보육수요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부모들은 아이를 맡길 곳이 없다고 여전히 아우성이다.
‘좋은 보육시설’에 들어가기 위해 몇 달, 몇 년씩 기다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양질의 시설’에 목말라 하는 것이다.
이는 ‘양적 팽창’에 ‘내실’이 따라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본보 5일자 A1면 보도에 나타나듯 0∼2세 영아를 위한 보육시설은 터무니없이 적다.
특수 수요를 맞추기 위한 ‘24시간 보육’, 출퇴근 상황에 맞춘 ‘시간연장형 보육’ 등이 꿈도 꾸지 못할 일인 것은 차치하고 아이들 발달단계에 따른 프로그램 개발조차 기대치에 훨씬 못미친다.
“보육시설이 질적으로 도약해야 할 때가 됐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