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아연실색했다. 각색을 혐오해 “자신의 소설을 보호하고 싶다면 그것을 각색할 수 없는 방식으로 써야만 한다”고까지 했던 밀란 쿤데라인데, 도대체 어떤 화상들이 그걸 영화로 만든다는 거지? 하지만 스태프들의 면면을 확인해보고 난 뒤 고개를 끄덕거렸다.
장 클로드 카리에르가 각색하고, 스벤 닉비스트가 촬영하고, 필립 카우프만이 감독한다고? 그 정도면 천하의 밀란 쿤데라도 마지 못해 원작사용 동의서에 도장을 찍어주었을만한 지구촌 대표선수들이다.
완성된 영화 ‘프라하의 봄’을 봤을 때는 캐스팅에 다시 한번 혀를 내둘렀다. 토마스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 사비나는 레나 올린, 테레사는 줄리엣 비노슈가 맡았는데 모두들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판 듯 기막힌 연기를 선보였던 것이다.
나는 사비나라는 캐릭터가 레나 올린의 몸을 통해 눈앞에 현현한 것을 보며 전율을 느꼈다. 아, 사비나는 저렇게 생긴 여자였군. 근사한 몸매와 영리한 눈빛 그리고 비관적 낙천주의와 고독한 배반의 음영이 짙게 드리운 얼굴.
사비나는 구속하지 않는 애인이다. 섹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섹스에의 장난스러운 몰입에서도 순간의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여자다. 구속당하기 싫은 만큼 구속하려 들지도 않으며 결혼제도, 사회적 통념 따위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삶의 비공식적인 부문’을 즐길 줄 아는 인간이다.
반면 테레사는 일부일처제 안에서만 안정감을 느끼는 여자다. 그녀는 의심하고 질투하고 구속하며 천천히 무너져간다.
테레사는 사비나와 토마스의 기이한 사랑놀음을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다. 테레사는 사랑스럽지만 귀찮은 여자이며 상처를 주고 받기에 익숙한 아내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할퀴기에 넌덜머리를 내고 있던 나는 언제나 사비나를 그리워했다. 사비나야말로 모든 남자들의 ‘드림 러버(꿈의 연인)’다. 그리고 놀랍게도 연애를 시작할 때의 여자들은 모두 사비나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심하라. 거기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숨겨져 있다. 몇번 잠자리를 같이 하면 예기치 못한 화학반응이 일어나면서 그 숱한 사비나들이 서로 협약이라도 맺은 듯 일제히 테레사들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토마스로서는 환장할 노릇이다. 드림 러버가 바가지 긁는 와이프로 변해버리다니…. 사과마저 손만 대면 금으로 바뀌어 아무 것도 먹을 수 없게 된 마이다스왕의 한심한 꼬락서니다.
밀란 쿤데라는 얄밉게도 이미 자신의 소설 속에 그 해답을 준비해놓고 있다. 사비나와 테레사 그리고 토마스와 프란츠는 모두 쿤데라의 자아 속에서 만들어낸 캐릭터들이다. 자신의 자아 속에서 사비나적인 면을 극대화한 것이 사비나이고, 토마스적인 면을 극대화한 것이 토마스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사비나를 찾아 헤매는 허튼 짓은 이쯤에서 그만둬야 될 것도 같다. 차라리 내 곁에 있는 테레사 속에서 사비나를 찾아보든가, 스스로를 토마스라고 믿는 내 속에서 프란츠를 찾아보는 게 상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도 여전히 사비나는 꿈 속의 애인이다. 사비나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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