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형색색 기기묘모한 컬러, 파스텔톤을 표방한 흐리멍텅한 유무채색들이 한바탕 홍수처럼 몰아치더니 이제 다시 '흑과 백' 이라는 원초적 색상들이 새 봄을 앞둔 선남선녀들을 유혹하고 있다.
요즘 서울 신촌이나 청담동 거리에는 흰색 제킷에 검은색 니렝스(무릎길이)스커트, 검은색 패턴스타킹, 바둑돌이나 점박이 모양처럼 흰색 검은색이 고루 섞인 토드백(손가방)으로 코디한 여성들을 심심지 않게 볼 수 있다. '단정한 부인복'을 연상시키지만 "고급스러워 보인다"며 10대들도 동참하는 추세다.》
2001 춘하복을 겨냥해 패션업체들이 제안한 색 배치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틀린 것이 있다면 ‘순백’과 ‘순검정’만큼이나 줄무늬 물방울무늬, 혹은 마치 컴퓨터 화면에서 버그가 일어난 것을 연상시키는 ‘그래픽디자인’ 등이 득세하고 있다는 것 정도다.
‘프라다’ ‘루이뷔통’에서는 줄무늬와 더불어 아예 꽃무늬까지 ‘흑백바탕 위’를 고집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모노톤의 의상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발렌티노’ ‘샤넬’ 등은 ‘시어(Sheer·비치는 직물)’ 소재를 주로 사용했다. 단순한 색상이라 시선의 분산효과가 적어 약간의 노출에도 섹시미가 강조된다.
같은 맥락에서 장미꽃장식 같은 코르사주(Corsage)나 비주(Bijoux·보석의 일종)가 박힌 머리핀도 ‘흑백판’에서는 더 두드러진다. ‘엠포리오 아르마니’는 허리선에 코르사주를 달았고 ‘안나몰리나리’는 칼라 윗 부분에 목걸이 대신 두툼한 코르사주를 얹었다. 흑백이 공존하는 핸드백이나 구두 역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품들이다.
사실 세계적인 톱 디자이너들은 시류와 상관없이 자신의 의복으로 검은색과 흰색이 들어간 것을 선호한다. ‘흑과 백’을 한층 세련된 색상으로 인정하는 것이 주된 이유.
또한 색채의 테크닉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키기 보다는 ‘디자인’에 보다 많은 정성을 쏟을 수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패션쇼가 끝나면 항상 검은색 티셔츠에 청바지로 관객들에게 답례하고 앙드레김은 언제나 우주복 같은 흰옷을 고집한다.
패션평론가 한영아씨는 “20세기말 각종 예술장르가 절충과 타협을 거듭하는 이른바 ‘퓨전문화’가 도래했었다”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 극과 극을 아우르는 흑백패션인데, 여기에 ‘자아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을 찾으라’는 사회적 메시지가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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