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에 위기는 상존한다. 위기는 우리처럼 해외의존도가 극히 높은 경제체제에서는 피할 수 없는 일상의 현실이다. 1700억 달러를 상회하는 수출을 하면서도 부존자원이나 기술이 부족하다보니 그에 상응하는 1600억 달러의 수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형편이니 우리 경제는 수출입 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원유가나 해외경기, 환율 같은 외부여건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당정회의 개방, 지혜 모아야▼
예를 들어 국제유가의 급등은 수출상품의 가격 경쟁력에 결정적 악재로 작용하고 수출시장의 21%를 점유하는 미국의 경기하락은 즉각 경제성장의 적신호로 받아들여진다. 환율은 아예 엔화동향이나 미국 증시의 움직임, 외국인 주식투자자금의 향방과 함께 춤을 춘다.
다시 말하면 우리 경제는 정부의 통제가 가능한 변수보다는 통제가 불가능한 변수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여건에서 경제가 좋아졌다고 자만하거나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 낙관론을 펴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위기상황은 언제라도 재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은 우리 경제 현실에 꼭 들어맞는 표현인지도 모른다. 정부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외부여건이 따라줘야 경제가 풀리는 형편이 그렇지 않은가. 80년대 중반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호황도 3저 현상이라는 외부환경 덕이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사정 때문인지 정책 당국에는 책임지려는 사람이 없다. 외환위기라는 국가적 재난상황을 겪은 후에도 과오를 반성하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내 잘못은 모두 불가피한 여건 탓이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니 남의 탓 잘하는 정치권은 항상 대립할 수밖에 없다. 야당이 현정권을 경제문제로 비난하면 현정권은 지난 정권의 실정 때문이라고 되받아치고 전 정권은 당시의 야당이었던 현정권의 방해를 변명으로 늘어놓는다. 여야가 바뀌어도 싸움의 내용은 판에 박은 듯 똑같다.
경제문제에 관한 한 정치권은 모든 지혜를 모아 최선의 정책을 수립해놓고 외부여건의 행운이 찾아주기를 기도라도 해야 될 상황에 그 제한된 정책수단을 정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경제정책 만큼은 여야를 떠나 최선의 방안을 택해 환경변화에 대처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나라의 지혜를 모으는 방안으로 정책풀(pool)을 제안하고 싶다. 경제문제에 관해서는 여야가 대립만 할 것이 아니라 협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다.
여야가 총무회담을 통해 정치일정을 조율하듯 정책위원회 의장단도 정례적으로 만나 경제정책을 논의하고 뜻을 모아 대안을 도출해내면 어떨까. 그럴 경우 국회는 정책의 집행 감시에 주력할 수 있을 것이다. 야당은 아예 새도우캐비넷(예비내각)을 지명해 정부의 정책을 항상 전향적으로 검토하고 경제문제 만큼은 당정협의에 야당도 참여시켜 함께 고민한다면 인재풀의 효과까지도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리하여 경제정책의 일관성과 효율의 극대화를 이룰 수만 있다면 장관이 바뀌거나 심지어 정권이 바뀌어도 정책기조가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 아닌가
▼정권 바뀌어도 기조 안흔들려▼
여야의 경제정책에 관한 입장 차이가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 만큼의 차이나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 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보면 정책의 합의가 그리 어려울 것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판국에도 국민이 보기에는 탐탁치 않은 일로 사사건건 대립하며 싸우고 있는 여야의 입장에서는 웬 꿈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코웃음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문제에 있어서 극단의 입장차이를 보이는 민주당과 자민련이 비품도 아닌 의원까지 꿔줘가며 공동정권의 노래를 합창하고 있고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개혁 대상인 전 정권의 인물들을 기용하는 드넓은 포용력을 보면 정책풀 정도는 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듯도 싶다. 여야가 밤낮으로 강조하는 상생의 정치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그렇게만 된다면 정치권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도 싸움질에 전념할 수 있는 부수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 결국 경제위기의 고통은 여도 야도 아닌 국민 모두의 것으로 남기 때문에 해 본 생각이다.
예종석(한양대 교수·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