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녀는 누구일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를 한 소녀의 뒷모습을 왜 그린 것일까? 게다가 허리 부분의 균형은 너무 위쪽으로 치우친 듯하고 모자나 옷 주름의 묘사도 정확치 않다. 그러나 아무도 왜 앞모습도 옆모습도 아닌 뒷모습을 그렸냐고 따지지 않는다.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도록 놔두는 것. 이것이 시민미술단체 '늦바람'의 마지막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미술시간 그 이후. 지난 10일부터 한양대 동문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제4회 늦바람 정기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은 모두 직장인, 주부 등 순수 아마추어가 그린 그림들이다. 전시회 제목이 말해 주듯, 미술시간 이후에 붓 한번 잡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틈틈이 그린 작품들이다.
13일 전시장을 찾았을 때는 늦바람의 연구생 이주연씨와 박보경씨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30평 규모의 전시장에 이제 막 붓을 잡은 취미반 학생들과 적어도 1년 이상의 경륜을 갖춘 연구반 학생들의 작품이 'ㄷ' 자 형으로 전시돼 있었다.
앞서 소개한 '뒷모습'이란 그림은 취미반 최상성씨의 그림. 액자 밑에 빨간 딱지가 붙어 있어 물어보니 전시중 팔린 그림에 붙이는 표시란다. 이 그림의 판매가는 단돈 1천원. 아는 분을 위해 거저주다시피했다는 후문이다.
'겨울논'이란 제목이 붙은 연구생 서선미씨의 작품에는 오랜 세월 물감냄새를 맡아온 연륜이 보인다. 구도와 명암도 안정돼 있지만, 무엇보다 암담한 듯 고즈넉한 겨울논을 표현한 색이 일품이다. 거실에 걸어두어도 멋져보일 듯한 이 그림의 판매가는 무려 25만원. 늦바람에는 만만치않은 아마추어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난 1995년 설립돼 지금까지 4회의 전시회를 가진 늦바람은 웬만큼 그림에 자신이 붙은 연구생과 이제 막 붓을 잡은 취미반으로 나뉘어 운영된다. 연구생이나 취미반 모두 직장인, 주부 등의 아마추어이고 연구생은 주 2회, 기초반은 주 1회 서울 성동구 홍익동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린다. 연구생 2명이 데생과 수채화 등을 중심으로 기초반을 가리킨다.
"입시 미술학원에서 배우는 것과는 많이 달라요. 가령 데생을 할 때 정확한 묘사보다는 사물을 관찰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데 집중하죠. '마음속 그리기'라는 것도 같이 하기 때문에 그림을 잘 그리는 것보다는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신경을 쓰게 돼요"
연구생 이주연씨는 늦바람의 교육과정이 입시학원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똑같이 그리는 것보다 다양하게 그리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늦바람은 정식 시민단체로 등록된 단체는 아니다. 민예총 산하 단체로 등록됐지만 성동구를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지역 문화 단체로 활동하고 있다는 게 이주연씨의 설명. 늦바람은 정기 전시회 외에 청소년과 함께하는 미술퍼포먼스와 서울대병원 소아과 병동 자원봉사 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끝까지 궁금한 것 하나. 왜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려고 할까?
"몰두할 수 있으니까요. 그림을 그릴 때는 10분이 됐든 1시간이 됐든 그림에만 몰두하게 돼요."
정말 그런 것일까? 돌아오는 길에 행인들의 '뒷모습'만을 유심히 봤다. 뒷모습은 누구에게나 알듯 모를 듯한 모호함을 던져준다.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싶은데 말로는 잘 되지 않을 때, 어디선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붓과 물감을 꺼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늦바람 연락처:02-2298-9468
안병률/ 동아닷컴 기자mokd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