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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법원이 제기한 '외압 의혹'

입력 | 2001-02-13 18:58:00


법원이 어제 한빛은행 불법대출사건 관련자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외압 의혹을 제기했다. 오직 증거에 따라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할 재판부가 추정(推定)이란 표현을 써가며 외압을 거론하고 이를 판결문에 남긴 것은 정말 이례적인 일이다. 이 사건의 핵심인 외압 여부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미진했음을 지적한 것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한빛은행 이수길(李洙吉) 부행장과 이촉엽(李燭燁) 감사의 지시로 문제의 관악지점에 대한 정밀검사가 유보돼 아크월드에 거액의 불법대출이 이뤄졌고 이 부행장 등의 이 같은 지시는 외부의 청탁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추정의 근거도 분명하게 제시했다. 우선 이 부행장과 거액의 불법대출을 받은 아크월드 박혜룡(朴惠龍) 사장은 별다른 친분 관계가 없는 사이임을 들었다. 그런데도 이 부행장이 관악지점에 대한 검사를 중단시킨 것은 외부의 청탁에 의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외압의 실체로 박지원(朴智元) 전 문화관광부장관을 지목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뤄 박 전장관이 박 사장의 부탁을 받고 한빛은행 상층부에 청탁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이 든다는 것이다.

요컨대 재판부는 이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선 외압 부분에 대한 판단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고육지책으로 ‘재판부의 의심’을 판결문에 남긴 것으로 볼 수 있다. 검찰이 제출한 수사기록이나 피고인들의 법정 진술만으로는 이를 확인하기가 어렵다는 단서를 달면서까지 구체적으로 외압 의혹을 제기한 재판부의 고뇌를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사실 지난해 8월 이 사건이 처음 불거졌을 때 이미 외압설이 나돌았으나 검찰은 증언이나 물증이 없다며 비켜가기 수사로 일관했다. 검찰의 수사가 결국 외압 의혹 관련자들에게 면죄부만 준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자 검찰은 서둘러 재수사를 한다고 했지만 결론은 여전히 ‘단순 대출 사기극’이었다. 국회 청문회도 허술하기 짝이 없어 국민에게 실망만 안겨주었다.

재판부가 지적한 대로 이 사건은 법보다 권력이 앞서는 권력만능주의, 원칙보다는 청탁이 앞서는 정실주의, 뒷거래를 중시하는 타락한 기업정신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수사과정에서 사건의 실체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다. 이제 다시 검찰이 답할 차례다. 검찰은 지금이라도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 그것이 곧 검찰이 영원히 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