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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경택칼럼]정치, 돈, 법

입력 | 2001-02-14 18:33:00


우리 정치판은 정당이나 개인이나 늘 돈문제로 싸우고 시달린다. 최근에만 해도 이른바 안기부자금사건으로 여야(與野) 공방이 그칠 줄 모른다. 한나라당은 DJ비자금을 물고늘어진다. 대우그룹 비자금 행방을 놓고도 여야는 서로 상대방을 의심한다. 여기에 전대통령 김영삼(金泳三·YS)씨도 끼어든다. YS는 무슨 근거가 있어서 하는 말인지는 몰라도 김대중(金大中·DJ)대통령이 대우로부터 정치자금을 가장 많이 받았기 때문에 김우중씨를 잡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한다. DJ는 돈 얘기가 나올 때면 항상 정치자금을 받긴 받았으나 조건이 붙은 것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판사의 '지나친 걱정'▼

정치자금과 관련해 지난주 있었던 민국당 대표 김윤환(金潤煥)씨에 대한 재판 결과는 여러 측면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공소장에 따르면 김씨가 기업인들로부터 인허가 및 대출알선 공천대가 등으로 받은 돈은 33억5000만원. 김씨는 순수한 정치자금이라고 주장하지만 법원은 공소 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해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하면서도 법정구속은 하지 않았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정치인이라고 그렇게 봐줄 수 있느냐’는 반응이다. 일반 공무원의 경우 100만∼200만원만 받아도 구속되는 것과는 너무 차이가 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런 일반의 법 감정을 모를 리 없는 담당 재판부로서는 구속 여부를 놓고 어지간히 고심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재판부는 판결선고를 하면서 법정구속을 하지 않은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했다. 첫째는 피고인이 여당의 대표 등 중요한 위치에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민국당 대표로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 둘째는 피고인이 받은 돈이 대가성 없는 순수한 정치자금이라며 범행을 부인하고 있어 항소심 심리에 상당한 기간이 예상된다는 점, 셋째는 나이가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세 가지 이유를 살펴보면 아무래도 군색하다. 첫째, 현재 정치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을 참작했다지만 오히려 비중있는 정치인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보다 더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는가. 둘째, 항소심 심리기간이 길어질 것까지 1심 재판부가 걱정한 것은 아무래도 지나친 배려다. 물론 상급심에서 무죄가 날 수도 있는 것이지만 1심 판사는 1심이 최종심이라는 자세로 판결하고 결정하면 족한 것이 아닌가. 항소심에서 어떻게 될 것까지를 염려할 필요는 없다. 셋째, 고령이라지만 현재 그의 나이(32년생)와 활동상황으로 보아 수감 생활을 못할 정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재판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는 이번에 법원이 김씨를 ‘봐준 진짜 이유’를 정치상황에서 찾고 있다. 가깝게는 현재 여야 국회의석 분포와 2석을 갖고 있는 민국당의 역할, 좀 멀게는 이른바 대권 구도와 그의 역할을 관련지어 해석하는 것이다. 이런 정치적 해석은 담당 재판부로서는 참을 수 없는 것이므로 함부로 얘기해서는 안되겠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해석이 ‘정설’인 것처럼 나돌고 있으니 어쩌랴.

문제는 검찰에도 있다. 지난달 검찰은 김씨에게 징역 5년을 구형했는데 이는 최저 형량이다. 김씨 수뢰액에 대한 특가법(뇌물) 법정 형량은 무기 또는 징역 10년 이상이다. 검찰은 그러나 피고인 사정 등을 고려해 절반까지 줄일 수 있는 이른바 작량감경(酌量減輕)까지 해주면서 5년을 구형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검찰이 과연 처벌 의지가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낡은 정치인 낡은 관행▼

법은 정치의 아래에 있나, 위에 있나.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아래에 있었다지만 민주화된 상황에서는 위에 있다는 게 옳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민주화됐느냐는 것이다. 겉으로는 민주화된 게 틀림없다. 그러나 여전히 영향력 있는 정치인은 옛날 그 사람들이고 정치자금을 모으고 쓰는 방식도 별로 나아진 게 없다. 낡은 정치인에 의한 낡은 관행이 계속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낡은 고리를 끊어내지 않으면 우리 정치는 한발짝도 선진화될 수 없다. 정치자금을 정말 투명하게 모으고 쓰는 혁신적 방안을 마련하지 않은 채 대선을 치르고 나면 누가 집권하든 ‘2002년 대선자금’이 다시 족쇄가 되어 정치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대권 후보라는 사람들은 이 점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euh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