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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만에 폭설 15일 오후 서울 표정

입력 | 2001-02-15 19:06:00


서울에 32년만에 폭설이 내렸다.

23㎝의 적설량을 기록하며 세차게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오후 4시부터 두 시간 동안 서울 일대를 돌아보았다.

낭만보다는 고단함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하는 폭설에 덮힌 서울거리에서 삶의 여유들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늘 시위가 끊이지 않던 미대사관 앞 전투경찰들도 이날 만큼은 방패와 곤봉 대신 약간은 낡은 우산을 하나씩 들고 눈을 피하고 있었다.







유모차 안의 아이에게 큰 우산을 들리고 똑같은 옷으로 맞춰입은 젊은 부부의 모습이 눈 속에서 더욱 다정해 보였다.







정동근처로 올라가는 고개에서는 분위기 탓인지, 정말 추위서인지 노점상 호떡과 어묵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고 관이나 민이나 제설장비 부족은 마찬가지인듯 시민들은 삽도 아니고 빗자루도 아닌 널판지로 굳어버린 눈덩이를 퍼 나르고 있었다.

신문가판대 할아버지는 카메라를 의식하고 자연스럽게 눈을 치우는 포즈까지 취해주고, 지나가던 꼬마들도 일부러 넘어지면서 연신 카메라를 주시했다.














서대문 전철역 근처에는 많은 차량들이 움직이길 포기하고 일부는 체인을 감고 있었다. 외국 외교관차량으로 보이는 외제차량 운전기사는 머리에 노란 비닐봉지를 쓰고, 손에는 빨간 고무장갑을 낀채 열심히 체인을 감았다.



서울의 한복판에서도 과연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있을까.

달동네 북아현3동의 정상에는 아직 어느 누구의 발자국도 없는 깨끗하게 쌓인 흰 눈이 있었다.









눈발이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한 5시경 북아현동을 내려오는 길에서 만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형제의 눈싸움은 정말 치열했다.







결국 동생이 신발을 잃어버리고 울기 시작하면서 전투는 끝이났다. 아마 집에 가서 혼이라도 나지는 않을까.







이 동네 주민들은 마을버스가 폭설로 인해 운행을 중단하는 바람에 가파른 고갯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눈이 그친 서대문 근처 상가 앞에는 20여명의 전투경찰들이 시위진압용 방패를 '용도변경'해 눈을 치우고 있었다.

시민들의 "수고합니다"라는 인사에 젊은 경찰들은 더욱 힘있게 방패로 눈을 퍼 올렸다.







해양수산부 근처 한 식당 앞에서는 눈을 치우던 20대 남자 종업원의 '행위예술'이 펼쳐졌다. 보도블럭 모양이 그대로 찍힌 '눈 판'을 화단 위에 여러 각도로 세워 놓고 있었다.

즐거운 작업이어서 인지 주변보다는 일찍 바닥을 드러내 보였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서대문까지 걸어서 15분, 차를 타면 하세월.'차에 탄 사람들은 언제쯤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까.지금상황이라면 영영 못가지 않을까'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해야할 정도였다.

뒤엉킨 차량의 행렬 속에서 목에 핏줄을 세워가며 호루라기를 부는 교통경찰의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정체는 풀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최건일/동아닷컴 기자 gaegoo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