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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이재희/서울대 ‘총장 잔디’의 소망

입력 | 2001-02-18 18:25:00


32년 만에 폭설이 내린 서울대 관악캠퍼스는 하얀 설국으로 변해 관악산과 어우러져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관악캠퍼스 한 가운데 있는 행정관 앞의 2000여평의 잔디광장도 설원으로 바뀌었다. 1975년 서울대가 관악으로 옮겨오면서 조성된 이 광장은 잡초를 뽑아주고 아침저녁 물을 주며 몇년을 정성껏 가꾼 결과 탐스러운 잔디가 풍성한 관악의 명소가 됐다.

하지만 80년 광주민주화항쟁 이후 대학가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캠퍼스에 진주한 계엄군의 군홧발은 소중한 잔디광장을 무참히 짓밟았다. 매일 저녁 얼룩무늬 위장복에 검은 베레, 검은 군화, 번쩍이는 총검으로 무장한 공수부대원들과 교직원들이 탐스럽게 자란 6월의 잔디광장에서 처연하기까지 했던 하기식을 거행했던 것이다.

계엄군의 군홧발에 짓밟혔던 잔디는 그 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일어나 철마다 계절의 색으로 옷을 갈아입으며 풀벌레를 좇아 날아드는 산까치 몇 마리와 함께 20여년의 세월을 한가롭게 보냈다.

그러나 군홧발만 벗어나면 자유로울 줄 알았던 잔디가 이제는 N세대의 주장에 짓눌리며 또 다른 수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머리카락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이고 남에 대한 관용보다는 자기주장을 앞세우는 N세대. 이들에게 잔디광장이 타파해야 할 권위의 상징으로 비쳐지면서 잔디밭은 ‘총장 잔디’로 불리기 시작했다.

수원에 있는 농생대의 관악 이전공사로 놀이공간이 부족하게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학생들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잔디뿌리까지 걷어차며 축구를 했고 행사나 집회 때는 잔디광장은 저잣거리로 변했다. 나무라는 교수들도 학생들의 반발에 머쓱해 하다 보니 누구도 이들을 말릴 수 없게 됐다. 각종 행사 뒤에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와 N세대의 운동화에 시달린 잔디광장은 누런 맨땅에 잔디뿌리가 드러난 채 썩는 냄새까지 풍겼다.

그러나 지난해 여름의 짧은 장마는 잔디의 끈질긴 생명력에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늦여름부터 원기를 회복하기 시작한 잔디에 무심한 행인들의 발자국은 아직도 위협적이지만 자연은 또 하나의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세상살이에 바쁜 인간들에게는 큰 피해와 교통지옥을 안겨준 폭설이 세파에 시달린 잔디에게는 더 없이 반가운 존재였다.

눈에 시달려본 사람들은 너도나도 밖으로 나와 눈을 치웠다. 간혹 젊은이들이 끼기도 했지만 골목에서 눈을 쓸고 치우는 사람은 대부분 할아버지나 아주머니였다. N세대들이 주변을 돌볼 수 있는 여유와 아량을 보다 많이 갖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일까.

이제 눈에 파묻힌 ‘총장 잔디’는 편안한 겨울을 보내고 있다. 당분간은 속살을 보여줄 필요도 없이 새 봄을 준비할 것이다. 25년간 관악캠퍼스를 지켜온 잔디의 새해 소망이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제발 새해에는 잔디를 아끼고 자연을 사랑할 줄 아는 새내기들이 많이 들어와 푸른 잔디와 함께 새롭고 활기찬 관악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이재희(서울대 예산담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