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O J 심슨 사건’으로 불리는 ‘치과의사 모녀살인사건’ 피고인 이도행씨에 대해 17일 서울고법이 무죄를 선고한 것은 범죄사실에 대한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는 ‘증거주의’의 원칙을 재확인한 것으로 평가된다.
대법원은 98년 이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2심 판결에 대해 “개별적인 간접 증거들의 증명력이 완전하지 않더라도 전체 증거가 종합적으로 증명력이 있다면 유죄를 인정할 수 있다”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씨가 범인일 가능성이 크니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는 것.
이처럼 대법원이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사건에 대해 재판부가 다시 무죄를 선고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과거의 판결을 뒤집을 결정적인 증거가 새롭게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부분의 파기환송심은 대법원의 취지대로 선고돼 왔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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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건을 심리한 서울고법 형사5부는 “범죄에 대해 좀더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는 게 법원의 최근 추세”라며 “확신할 수 없는 증거들을 토대로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사건 당시 이씨의 유무죄를 판단할 중요한 증거로 검찰이 제시한 것은 숨진 최씨의 시반(시체에 나타난 반점)과 시강(시체의 굳은 정도) 등을 토대로 ‘사망시간이 이씨가 출근한 오전7시 이전일 가능성이 높다’는 국내 법의학자들의 감정결과.
이에 대해 재판부는 “시강 등의 현상은 온도 등 주위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고 독일 등 외국 법의학자들도 이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며 그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화재 발생시간이 7시 이전으로 나타난 컴퓨터 시뮬레이션 실험결과에 대해서도“정확하지 않은 수치를 대입해 측정한 연산결과만으로 발화 시간을 측정하는 것은 다분히 자의적”이라며 이씨가 불을 질렀다는 검찰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유죄임을 밝힐 수 없다’는 재판부의 판결이 곧 ‘이씨가 범인이 아니다’는 결론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닌데다가 검찰도 상고의사를 밝히고 있어 이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또다시 이번 판결을 뒤집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 6년 이상 계속돼온 이 사건은 또다시 유무죄의 반전을 거듭하는 ‘핑퐁 재판’이 될 전망이다. 과거에도 드물기는 했지만 재판부마다 유무죄의 판단이 달라지는 바람에 대법원과 고법 사이에서 2, 3번 이상 파기환송과 상고를 되풀이한 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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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행씨 일문일답▼
18일 ‘치과의사 모녀살인사건’ 무죄선고를 받은 이도행씨(39·외과의사·사진)는 판결 직후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듯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외과의사로 사건 당일 개인병원을 개업할 예정이기도 했던 이씨는 98년 무죄선고를 받고 석방된 뒤 외국인 노동자 진료소에서 무료 봉사활동 등을 하며 의사활동을 계속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이씨와의 일문일답.
―무죄선고를 받은 소감은….
“…검시제도를 좀 바꿨으면 좋겠다.”
―재판부의 판단에 대해서는….
“(재판결과가) 처음부터 이렇게 나왔어야 한다.”
―그동안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지금까지 사형선고를 한차례, 사형 구형을 3번 받았다. 이 정도면 다들 짐작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함께 기도해 주고 도와준 사람들 덕분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한다.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지금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돼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게 사회구조가 바뀌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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