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질때 각자가 자신의 엄마,할머니,가족을 떠올리며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바라볼 수 있었으면…"
'고추말리기' 장희선 감독의 바램이다.
정확히 2월 21일 오후 2시 14분 영화는 끝나고 불은 켜졌다. 영화는 끝났지만 아쉽게도 장감독의 바램대로 가족의 모습이 애틋하게 떠오르진 않았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모녀가 영화를 보고 어떤 감정이 들었을지 더 궁금했기 때문이다.
'고추말리기'는 장희선 감독이 자신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출연시켜 실제 자신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상들을 담아낸 16㎜ 중편영화. 주된 내용은 그리 살갑지 않은 고부사이, 애증이 살아있는 모녀사이 등 세여자의 평범한 삶의 이야기다.
'모녀'를 다룬 영화를 보고 난후 실제 모녀가 나눌 얘기가 궁금해 일어서서 나가는 그들을 살며시 뒤쫓았다.
별 소득은 없었다.
영화 시작전만 해도 정답게 얘기를 나누던 모녀가 영화가 끝난 후에는 간격 1m, 방해받지 않을 정도의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묵묵히 앞만보고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모녀는 말이 없어졌을까.
▼"나는 엄마가 밉다. 그런데 가끔 불쌍하다"▼
"살빼!" 영화속에서 가장 많이 나온 대사다.
어머니는 극중 희선에게 허구헌날 살빼라고 닦달한다. 희선이 밥을 먹고 있거나 TV를 보고 있거나 어머니는 늘 살빼서 시집가라는 말 뿐이다. 희선에게 '살찐 괴물'이라며 놀리기도 한다.
희선은 그런 어머니가 밉다.
"자기가 언제 밥이라도 차려주고 말을 하던지…어떻게 저런 여자가 내 엄마일 수 있냐"
친구에게 털어놓는 푸념이다.
희선은 어렸을 때 어머니와 떨어져 할머니와 살아야 했다. 게다가 늘 바깥일로 바빠 집안을 거의 돌보지 않고 스트레스만 주는 어머니에게 희선은 야속한 마음이 들었던 것.
하지만 이들이 서로 나누는 거친말들은 진심이 아니다.
영화 중간중간 보여지는 실제 장감독과 어머니 설정원씨의 대화에서 이들의 속내가 나타난다.
부득이하게 떨어져 살아야만 했던 어린 딸이 어느날부턴가 자신보다 할머니를 더 따르자 마음이 아팠다는 어머니. 모르는 척 했지만 어머니의 그런 마음을 다 알고 있었던 딸.
이해하지 못하는 척 하며 거칠게 대하지만 어머니와 희선은 서로의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할머니가 좋다. 그런데 가끔 짜증난다"▼
희선은 어릴적부터 어머니보다 할머니와 같이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할머니가 온종일 매달려 있는 것은 집안일이다. 빨래며 청소며 요리며 모든 일이 할머니의 몫.
"이 집 사람들은 일할거리가 눈에 안보이나봐. 내눈에는 온통 일할거리 천진데…"
집안일만 하다 훌쩍 칠순을 넘겨버린 할머니. 희선은 그런 할머니가 안타깝지만 짜증도 난다.
열아홉에 시집와 할아버지의 바람기를 다 참아내고 그리 넉넉하지 않았던 살림을 도맡아 꾸리면서 이날 이때까지 살아온 할머니의 삶이 못내 답답했던 것이다.
게다가 할머니는 집안일은 돌보지 않고 바깥으로 나도는 며느리에게 불만이 있으면서도 정작 앞에선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희선은 그런 할머니와 어느새 둘도 없는 사이가 돼있다.
'고추말리기'감독 장희선씨(오른쪽)와 어머니 설정원씨
"평소 여성이란 주제에 관심이 많았어요. 하지만 이론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더 큰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죠. "
장감독은 서로 얽혀있는 세여자의 삶을 보여주며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한 여자가 가족관계에 있는 다른 여자의 삶을 이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주려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모녀 주위에 감도는 어색함을 이젠 알 것 같기도 했다.
몰랐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어머니의 감정·딸의 감정을 서로 알아버린 난처함. 일시적으로 그들을 멀어지게 한 것이다.
아마 저들은 '어머니와 딸'이라는 관계를 던져버리고 서로를 여자로써 바라보기 시작했을 것이다.
모녀는 비록 말은 없어졌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녹녹해지고 있는 것은 감출 수 없었다.
'고추말리기'는 그런 영화였다.
이희정/동아닷컴기자 huib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