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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왜곡]침략 역사 미화 …부활하는 '군국망령'

입력 | 2001-02-21 18:30:00


과거 역사와 주변국의 처지를 무시하고 일본의 해석만을 강조한 일본의, 일본을 위한, 일본에 의한 역사교과서가 내달 초 일본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한다. 우익단체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집필한 이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최근 우익의 논리가 무섭게 힘을 얻고 있는 일본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는 생생한 사례이다. 일본 정부마저 사실상 주변국의 반발을 무시할 정도로 크게 변한 일본의 최근 사회상을 조망한다.

일본의 우익 인사들이 기존 교과서를 바꾸려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그 해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가 아시아 국가들을 상대로 한 일본의 침략에 대한 사과. 우익 인사들은 일본이 왜 사과를 해야 하느냐며 무라야마 총리를 비난했다.

기존의 교과서들이 모두 일본군위안부를 다루기 시작한 것도 또 다른 계기다. 일부 인사들은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그런 사실을 가르치는 것은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며 완곡하게 반대 의견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들의 속셈은 ‘일본의 치부는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를 옹호하기 위해 군위안부는 사실이 아니며, 개인적인 상업행위였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이 같은 움직임은 소위 ‘자학사관(自虐史觀)’ 논쟁으로 비화됐다. 기존의 역사교과서들이 너무 일본을 비하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고 이에 동조하는 인사들이 95년 ‘자유주의사관’연구회를 만들었다. 산케이신문은 96년부터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라는 기사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집필자는 물론 ‘자유주의사관’연구회 회원들이었다.97년 1월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전기통신대 교수, 후지오카 노부가쓰(藤岡信勝) 도쿄대 교수 등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만든 것도 같은 맥락. ‘자유주의사관’에 입각한 교과서를 스스로 만들겠다는 것이 이 모임의 목적이었고 이번에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받는 교과서가 바로 이 단체가 만든 책이다.

이 교과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점을 갖고 있다. 가장 큰 잘못은 일본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주변국의 주권이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고 있다는 점. 일본은 당시 아시아에서는 단연 강대국이었고 힘이 있었기 때문에 서구 열강으로부터 이지메를 당한 것이며 결코 일본이 잘못한 것은 없다는 주장이다. 기존 교과서들도 이들의 주장에 큰 영향을 받았다. 기존 7개 교과서가 군위안부 기술을 아예 삭제하거나 대폭 줄인 것이 대표적인 사례. 기존 교과서들은 이를 ‘자주규제’라고 부르고 있으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끊임없는 공격에 물러선 것이 틀림없다.

우익 인사들의 활동에 도움을 준 것이 바로 정치권이다. 자민당은 93년 8월 당내에 ‘역사 검토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일본의 침략을 부정하고 이를 국민의 역사인식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국민운동’을 부추기고 ‘새로운 교과서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제창했다. 모리 요시로(森喜朗)총리를 비롯해 현 내각 각료 중 7명이 바로 이 ‘역사 검토위원회’ 멤버였다.

부(負)의 역사를 청산하고 일본을 ‘보통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일부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주장도 역사에 덧칠을 하는 데 도움을 줬다. 줄곧 사과만 해서는 일본의 정치대국화는 힘들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최근 정치적 불신과 경제적 불황을 틈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가 위안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ksshim@donga.com

▼"개입 안한다" 일본 정부 발뺌▼

일본 정부가 역사 교과서 검정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은 주변국의 반발보다는 국내의 여론을 더 의식한 결과다. 외부에서 매를 맞더라도 내부의 지지 세력을 잃을 수는 없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한국과 중국 등은 일본 정부에 대해 직 간접적으로 문제의 교과서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며 이의 시정에 노력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은 문부과학성이 하는 일이라 직접적인 개입은 힘들다는 입장이었고, 문부과학성은 검정조사위원회가 검정 중이므로 개입하기가 어렵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한마디로 뚜껑을 열어봐야 알 것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왜곡 역사교과서에 반대 입장을 취해온 시민단체들의 주장은 다르다. 뚜껑이 열리면 이미 때가 늦다는 것이다. 예년 같으면 검정과정에서 문제의 내용들이 새어 나와 언론의 조명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는 언론도 꼼짝할 수 없을 정도로 극비의 보안 속에 검정이 진행되고 있다.

결국 일본 정부로서는 검정절차상의 이유를 앞세워 시간을 벌어왔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발을 뺐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정부가 이런 태도를 취함으로써 한국 정부가 활용할 수 있는 카드는 거의 없게 됐다. 만약 검정이 통과된 뒤 내용을 문제삼을 경우 일본 국내에서는 내정간섭이라는 역풍이 불어 오히려 반한(反韓) 감정이 거세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