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파리에서 열린 ‘세계화와 지식인의 역할’에 관한 유네스코 학술 모임에 다녀오면서 여러 가지로 서글픈 사념에 잠겼었다.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지식인들의 현실 비판이 사회 변혁에 미친 영향은 컸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는데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 세력으로서의 지식인 집단의 성격에 대한 논의가 슬그머니 사라지고 만 것 같기 때문이었다.
이는 극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교적 안정된 유럽 사회에서도 지식인들의 사회적 역할에 기대를 걸며 막대한 예산을 들여가면서 세계 도처의 학자들을 초청해 이들의 지혜를 모으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에 열린 유네스코 모임도 바로 그런 성격이었다. 그런 마당에 우리의 형편에 생각이 미치니 그 심각성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정부참여 당연시 이상한 일▼
군사정권 때 온갖 핍박을 받아가면서도 불의에 항쟁했던 지식인들이 이른바 민간 정부가 출범하면서 ‘이 정권은 군사정권과 다른 정권’ ‘정통성이 있는 정권’이라는 등의 생각을 갖고 이에 가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경향은 곧 ‘지식인들의 현실 비판이 그 타당성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는 믿음으로 이어졌고 그 이후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들의 역할은 상당히 무의미해진 감이 있다.
군인 출신들이 물러나고 ‘문민 정부’나 ‘국민의 정부’가 들어섰다고 해서 이 나라 정치 체제의 정통성이 확립됐다고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군화가 등산화로 바뀌고, 때가 되면 사면의 폭을 전보다 더 넓힌다는 것 이외에는 정치 운영이나 경제 관리에서 과거의 정권과 별로 다를 바 없는데도 민간 정부가 정통성이 있고, 지식인들이 이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군사정권에 가담하는 지식인들을 ‘어용학자’ ‘관변학자’라고 매도하던 때와 지금의 통치양식 사이에 별 차이가 없음에도 이들 지식인들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상한 일이다. 과거 군인 출신들은 ‘비판적 지식인’들을 두려워하며 이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척이라도 했지만, 지금의 정치 지도자들은 독재에 항거했다는 경력 때문인지 지식인들을 아주 우습게 여길 뿐만 아니라 통치에 방해가 되는 집단으로 기피하는 듯하기까지 하다.
더욱 이상한 것은 ‘신지식인’이 현 정권의 주요 개념으로 등장하면서 기성의 지성인 집단의 무력화가 은연중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학이 상업과 공업 중심의 전문학교로 재구성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장 원리 속에 현금 가치가 없는 인문학이 바겐세일에서마저 밀려나는 처지가 되면서 지성의 원천이어야 할 인문학은 점차 대학의 교과과정에서 소외되고 있는 형편이다.
신지식인이란 알고 보면 군사정권에 항거했던 지식인들이 그처럼 혐오했던 ‘기능적 지식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저항적 지식인들이 정권에 참여하면서 이를 발전 전략의 중요 개념으로 삼았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유럽이 수많은 유혈혁명과 전쟁을 겪었음에도 번영된 안녕을 누리게 된 것은 정치 지도자들이 그들의 현실주의에도 불구하고 사상가들과 대학인, 그리고 언론인들의 이상주의를 자기 반성의 기준으로 삼아 왔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의 초당파적인 비판에서 정치와 경제의 방향을 찾아 왔던 것이다.
유럽의 대학은 자본주의 시장 원리와 관계없이 모든 분야에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들이 근래에 논의중인 인문학의 위기는 연구 방법론상의 위기일 뿐 우리 사회에서와 같은 ‘학문의 시장’에서의 퇴출 위기는 아니다. 인문학자들이 신지식인들에 의해 밀려나는 경우와는 전혀 다른 상황인 것이다.
▼초당파적 비판엔 끝이 없어야▼
저항적 지식인들이 ‘관변인’이 되는 과정에서 우리 대학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정말 한탄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분명히 까닭이 있을 것이다. 아마 과거의 야당이 여당이 되면서 평소 생각하던 민주주의에서 후퇴한 현상과 한때의 저항지식인들이 권력 주변에 들어가면서 지성을 저버린 현상 사이에는 일맥상통하는 흐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발전 방향과 관련한 논의에 지식인들의 영향력이 거의 없는 모습도 저항적 지식인들의 이같은 변신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일일 것이다.
차인석(서울대 명예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