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일본에 갔습니다. 이번에는 한 일주일쯤 머물렀습니다. 취재 핑계를 대고 간 여행이지만 틈틈이 친구들과 만나 오랜만에 술 한 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분위기가 사뭇 좋았는데 오사무란 친구 녀석이 이런 말을 늘어놓아 분위기를 완전히 깨버렸습니다.
"정신없이 대학에 들어가고 보니 이젠 취직 때문에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고 겨우 취직했다 했더니 사회인 3년 차에 덜컥 결혼, 한 집안의 가장이 됐지. 꼴에 가장 노릇 한다고 과장 자리까지 오르느라, 또 집 할부금 갚느라 미친 듯이 뛰어왔더니 이제 마흔이 내일 모레. 무엇 때문에 무얼 하며 살아왔는지… 지금에사 돌아보면 쏜 화살이 궤도를 질주해 어느새 과녁까지 이른 것만 같아 허무할 때가 많다. "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같지 않으세요? 그렇습니다. 이 녀석이 하는 말은 의 스기야마가 마이에게 하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 직장인들도 중년에 접어든 나이라면 흔히 하는 소리인데, 지금 일본은 10년째 불황이라 오사무 의 넋두리가 예사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불황이 가져다준 여파는 꽤나 커보이더군요.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가 아니면 좀처럼 거지 모습을 보기 힘들었던 일본이지만 이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와 좀 다른 점이라면 일본 거지들은 그래도 자기가 덮고 잘 이불이나 골판지 같은 것은 꼭 자기 손으로 챙기고 있더군요. 신문지 덮고 자는 거지는 좀처럼 보기 힘듭니다.
불황의 여파는 영화에까지 미쳤나 봅니다. 술도 함께 한 사이라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의 츠카모토 신야 감독은 지금 돈 버느라 정신이 없다고 합니다. 는 츠카모토 신야 감독이 처음으로 메이저 영화사와 손잡고 만든 작품이라 돈 좀 벌었을 줄 알았더니 예상 밖으로 오히려 빚만 졌다고 하더군요. 프로듀서의 농간 때문에 자기 돈만 수억 날렸다나요.
츠카모토 감독은 이 돈 메우느라 지금 연출보다는 연기에 더 열을 올리고 있답니다. 물론 연기도 아주 훌륭한 예술 가운데 하나지만 연출에 뛰어난 역량을 가진 츠카모토 감독이 돈 때문에 '엉뚱한' 분야에서 힘을 낭비하고 있다면 이건 아무래도 뭔가 잘못 돌아가는 게 아닐까요.
일본의 불황은 우리 나라만큼이나 구조적인 문제라고 합니다. 경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뭔가 크게 잘못돼 있기는 한 모양입니다. 전쟁 후 파죽지세로 경제를 부흥시켰지만 그 와중에 정치와 경제가 유착돼 뇌물 없이는 정상적인 경제 행위가 불가능했고 관 역시 썩을 대로 썩어 툭하면 공무원 비리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곤 했으니까요. 이러면 언젠가는 '불황의 둑'이 순식간에 터져버릴 게 뻔한 일이었겠지요.
3월 중순 개봉될 는 일본의 경제가 정상이 아님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총회꾼'은 일본 경제계에만 있는 독특한 존재입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주식을 보유하고서는 주주총회에 참가, 얼토당토 않은 행패를 부리며 주주총회를 방해함으로써 특정 집단에 이익이 되게끔 하는 벌레같은 존재지요. 우리 나라에서도 발행돼 있는 일본 경제 만화들에도 이 총회꾼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곤 합니다.
는 이 총회꾼들을 거느린 거물 총회꾼에게 거대 은행이 막대한 자금을 불법으로 대출해 생기는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란 데뷔작 한 편으로 샛별 대우를 받았던 하라다 마사토 감독이 연출을 맡았는데 재작년 일본 개봉 때 꽤나 좋은 흥행 성적을 올렸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거물 총회꾼에게 돈을 불법으로 대출해준 장본인은 다름 아닌 은행의 거물 실세. 불법 대출 탓에 은행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하자 야쿠쇼 고지를 비롯한 젊은 은행 중간간부 다섯 명이 과감히 거물 실세와 한판 대결을 벌인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인물들이 영화가 아니라 우리 나라나 일본 사회에 많아야 불황을 빨리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우리 사회는 여간해서 영화처럼 되질 않는군요. 좀더 뜨거운 맛을 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김유준(영화칼럼리스트)http://www.66090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