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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하성란/고층아파트서 보는 세상

입력 | 2001-02-25 18:37:00


도대체 언제 또 이사를 한 거냐고 바뀐 주소를 알려달라는 친구들에게 주소를 불러주면 상대방이 대뜸 하는 말이 ‘전망 하나는 끝내주겠군’이다. 몇몇 친구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을 정도로 성공했으니 축하한다며 우스갯소리를 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아파트의 맨 꼭대기 층, 그것도 25층이다. 버스로 다섯 정거장 거리 안의 풍경이 한눈에 다 잡히고 일요일마다 어머니가 등산하는 관악산 한 자락도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 이사온 뒤부터 일부러 값비싼 음식값을 치르면서 전망이 좋은 스카이라운지를 찾아갈 필요가 없어졌다. 식탁을 베란다로 옮기고 식탁 중앙에 초 하나만 꽂아두면 그만이다.

▼보이는 것은 오직 빌딩숲▼

몇 개월 연락이 두절됐던 친구는 네 전화번호 아느라 애를 먹었다면서 왜 이렇게 이사를 자주 하느냐고 했다. 우리는 지금 이 집으로 오기까지 2년 동안 세 번 이사를 했다. 그 전에 5년 동안 살았던 신혼집은 오래 된 아파트의 1층이었다. 햇빛이 들지 않아 하루 종일 전등을 켜놓아야 했다. 한여름에도 창문을 열어둘 수 없었다. 건너편 아파트에서 집안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이었다. 아파트와 이웃한 창문에는 365일 내내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다. 그곳에서의 기억은 걸핏하면 전구를 갈아끼워야 했던 것과 아이의 귀지를 청소할 때 아이의 작은 귓속이 잘 보이지 않아 애를 먹던 것이었다. 그 집에 비하면 25층에 있는 지금 집은 해가 기울 때까지 하루 종일 햇빛이 거실 깊숙한 곳까지 들이찬다. 어느 전구보다도 눈이 편한 자연광이다.

우리가 두 번째로 살았던 집은 아파트의 2층이었는데 남향은 아니었지만 반나절 동안은 전등을 켜지 않고도 살 수 있었다. 신도시 정책에 따라 지어진 아파트라 공원이 많았고 창문을 열면 정원수의 푸른 물결이 발 밑에 펼쳐졌다. 단 하나 위층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문제였다. 조용한 시간은 위층에 사는 두 아이가 자는 시간뿐이었다. 좀 조용히 해달라고 몇 번 인터폰을 넣다가 제풀에 지쳐 그냥 두었다. 뛰어야 아이들이지 뛰지 않으면 그게 아이들이냐는 것이 아이 엄마의 답변이었다.

25층으로 이사왔을 때 우리는 그 지겹던 소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친정 어머니는 텅 빈 옥상에 여름 내내 고추를 말릴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좋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건너편 아파트 옥상에서 불미스러운 사고가 발생한 후부터 밤잠을 설치게 됐다. 혹시 누군가 옥상으로 올라가는 철제문을 여는 것은 아닐까, 깊은 밤이면 25층에 와 멈추는 엘리베이터의 소리마다 신경이 쓰인다. 베란다에 나갈 일이 있으면 건너편 아파트들의 꼭대기를 살피는 것도 습관이 되었다. 잠깐 실의에 빠져 독한 마음을 품고 꼭대기로 올라온 사람이 있다면 발견해서 험한 일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수도 계량기가 동파되고 생활하수가 얼어 역류하는 등 유난히 추운 겨울이 계속됐다. 수은주가 떨어질 때마다 세탁기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방송이 이어졌다. 하지만 고층에 살고 있는 누군가가 계속 세탁기를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맨 꼭대기 층에 사는 사람들부터 의심받는 것은 당연했다. 하루에도 몇 번, 아래층에 사는 사람들이 올라와 초인종을 눌러댔다.

▼사람냄새나는 아래층 그리워▼

거리가 멀어 한 번도 가지 않는 백화점의 이름까지 볼 수 있는 대신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은 볼 수 없다. 너무 높아 가까운 곳의 풍경은 아예 뭉텅 잘려 있다. 베란다 창을 열고 방충망까지 연 후에 상반신을 거의 다 내민 위험천만인 자세라야 꼬물거리는 아이의 콩알 같은 머리가 보일 뿐이다. 화초도 시름시름 말라죽어 하나씩 들어내다보니 어느새 베란다가 텅 비었다.

한밤중 잠자리에 누워 문득 내 밑으로 24개의 집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허공에 위험천만하게 매달린 새 둥지 같다는 느낌이다. 자꾸 날 아래로 끌어당기려는 중력 때문에 베란다로 나가 여유롭게 전망을 감상하지도 못한다. 전망이라야 울퉁불퉁한 회색 건물들과 스카이라인뿐이다. 놀이터에서 노느라 밥 때를 잊은 아이를 창문을 열고 부를 수도 없다.

조용함과 고추를 말릴 수 있는 옥상까지 덤으로 얻은 대신 내가 잃은 것은 무엇일까. 다시 저 아래로 내려가고 싶을 뿐이다.

하성란(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