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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억 이슬람과의 대화]'중동의 맏형' 이집트

입력 | 2001-02-25 18:44:00


《이집트 고대문명을 낳은 문명의 젖줄, 나일강을 끼고 들어선 인구 1600만명의 수도 카이로. 높이 146m의 웅장한 5000년 전 유적, 피라미드를 뒤로하고 시내에 들어서면 곳곳에 모스크(이슬람 사원)와 함께 집채만한 크기의 초상화가 눈길을 끈다. 20년째 장기집권 중인 무하마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다. 사회주의 국가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는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81년 10월 친미적인 개방정책과 이스라엘과의 평화정책 노선에 반발한 이슬람 원리주의 과격파에 의해 피살된 뒤 집권했다. 초상화 밑에 씌어진 ‘평화를 이끄는 나라, 이집트’ ‘문명의 땅, 이집트’ 란 글귀는 아랍국가 내 이집트의 독특한 위상을 시사해 준다.》

아프리카 대륙의 북동부 끝, 아시아 대륙과의 접경에 자리잡은 이집트는 7세기 이슬람 세력에 점령된 이래 이슬람교의 아프리카 진출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빛나는 문명의 역사와 전통, 인구 7000만명의 시장, 네 차례의 중동전쟁을 주도하며 키운 정치력으로 ‘아랍 세계의 맏형’으로 불린다.

시나이반도 끝 휴양지인 샤름알세이흐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유혈충돌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회담이 이집트의 중재로 자주 열린다. 최근 이라크 대공 감시망을 미군기가 공습하자 이집트는 즉각 이라크에 경제장관을 보내 우의와 지지를 보였다. ‘맏형’ 노릇을 하려는 외교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이집트의 주요 모스크와 관청, 대학과 호텔, 박물관과 유적지 등은 러시아제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과 경찰이 지키고 있다. 이는 관광객을 보호하기 위한 것. 97년 11월 룩소르에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관광차량을 공격해 62명을 살해했다. 테러 이유는 관광객의 자극적인 옷차림, 남녀간의 ‘해괴한’ 행동, 음주 등으로 이슬람 가치관이 무너진다는 것. 서구화에 따른 아랍세계의 정체성 상실에 대한 과민반응이었다.

80년대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본거지로 삼았던 카이로대를 찾아보았다. 정치집회에는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 학생들은 강의실 복도와 건물 밖에서 학점 취직 등을 화제로 시끄러웠고 휴대전화는 쉴새없이 울렸다. 경제학부 4학년인 여학생 니빈(21)은 “테러리스트는 어느 나라에나 있잖아요”라며 관광산업 때문에 이집트의 이슬람적 가치관이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서구화의 물결은 벌써 이집트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미인관의 변화도 한 사례다. 가족농 형태의 농경사회에 적합한 통통하고 육감적인 여성이 과거에는 좋은 아내감이었으나 이젠 키가 크고 날씬한 여성이 인기다. 저녁 무렵 카이로의 타흐리르(해방)광장과 카이로 타워 전망대, 나일강변 등지에서는 청춘남녀가 껴안고 밀어를 나누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카이로 시내 행인 중 이슬람 고유의상을 입지 않은 사람이 절반이나 됐으며 특히 젊은 남성 가운데는 입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슬람국가의 공휴일인 금요일 정오 예배시간에도 한쪽에서 예배를 드리건 말건 물담배를 피우거나 잡담을 하는 이도 많았다.

이집트는 1957년 왕정이 붕괴된 이후 사회주의 정책을 편 탓에 여성 참정권, 여성의 이혼청구권 등 여성의 권리가 다른 이슬람 국가보다 빨리 인정됐다. 이런 탓에 카이로 시내 서점에는 ‘콜아(여성이 먼저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에 관한 서적도 눈에 띄었다. 차선과 횡단보도가 거의 없는 데다 낙타와 나귀가 예사로 다니는 도로를 곡예 하듯 오가는 차량 물결 속에서 여성운전자도 많이 눈에 띄었다.

이스라엘과 수 차례 전쟁을 치른 끝에 평화협정을 체결한 역사적 경험 탓인지 카이로 시민 중 이스라엘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인 사람은 별로 없었다. 카이로에서 시나이반도 쪽으로 자동차를 타고 두시간 가량 가면 수에즈운하 못 미쳐 전쟁기념관이 서 있다. 수에즈운하 맞은 편 시나이반도를 점령한 이스라엘군을 이집트가 선제 공격한 73년 전쟁을 기념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무라바크 현대통령이 작전회의를 하는 사진도 있었다. 지난해 지원 입대한 경비병 아흐메드 세켈(22)은 “무바라크 대통령은 현명한 지도자인만큼 전쟁이 재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행사 직원인 라시드 엘 타흐위(30) 역시 “무바라크 대통령은 국제정치관계에서 국민의 높은 지지를 얻고 있다”며 이스라엘에 대한 평화노선을 환영했다.

이슬람국가인 이집트는 이처럼 ‘이교도’ 집단인 이스라엘과의 평화정책을 추구해 오면서 일부 아랍국가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랍 세계의 맏형’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숱한 외침 속에서 보존해온 강력한 문화적 전통의 힘, 즉 ‘문화적 정치력’에 힘입은 바 크다. 기원전 3000년경 통일왕조가 들어선 이래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에 멸망하기까지 고도의 사회 정치조직과 문화체계를 갖추고 피라미드를 비롯한 거대한 석조건축물을 인류사에 남긴 그들이다.

이런 사정이야 있겠지만 이집트인의 높은 자존심은 이방인의 눈에는 때로 ‘까닭 모를 오만함’으로 비친다. 카이로 시내의 연평균 강우량은 서울에서 여름 한나절에 내리는 양에 맞먹는 35㎜에 불과하고 20년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곳도 있다. 전국토의 95%가 사막인 척박한 나라여서 다른 석유 부국 중동국가에 비하면 가난하다. 200만명이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국가와 프랑스 네덜란드 등지에서 험한 일을 맡고 있다. 이들 국가에서는 ‘이집트인’ 하면 한 자락 깔고 본다. 해외에서 하대를 당하는 반면 국내에서는 외국인을 얕잡아 본다는 것이 한국 유학생이나 교민의 공통된 평가다. 카이로대나 유명한 이슬람종교대학인 알아즈하르대에는 수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세계의 이슬람 국가에서 온 유학생이 많다. 이들은 종교는 같지만 피부색과 민족이 달라서인지 무시당할 때가 많다고 한다.

서구화의 영향으로 때론 이슬람국가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이집트. 하지만 피라미드 뒤편 리비아사막으로 해가 사라지면 어김없이 모스크에서 들려오던, 예배시간을 알리는 ‘아잔’ 소리는 여기가 전 인구의 85%가 이슬람교도인 나라 이집트임을 일깨워주곤 했다.

▼수에즈 운하…100km 물길서 연 17억 외화벌이▼

수에즈 운하는 홍해의 수에즈에서 이스마일리아시를 거쳐 지중해의 포트 사이드에 이르는 100㎞ 남짓한 수로다. 몇 개의 호수가 중간에 있어 굴착한 길이는 얼마 되지 않지만 이 수로는 세계의 교역로를 바꾸어 놓았다.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도는 영국 런던∼싱가포르 간 항로는 2만4500㎞였지만 수에즈운하가 생기면서 무려 1만㎞ 가량이 줄어들었다. 물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카이로 동쪽 134㎞ 지점. 사막을 가로지르는 왕복 2차로 도로를 자동차로 2시간 가량 달리면 폭 200∼300m의 운하가 나타난다. 시나이 반도가 바로 건너편에 보인다. 운하 입구에 서 있는데 마침 운하로 진입하는 배 위에 ‘한진’ ‘조양’ 등 한국의 해운회사 이름이 선명한 컨테이너가 가득 쌓여 있는 것이 보여 감동적이었다.

수에즈운하는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군에 점령당하기도 했으며 중동전쟁 때에는 이스라엘군에 장악된 적도 있다. 지난해 운하 통관수입은 17억8100만달러로 이집트 외화 총수입의 15.6%. 수에즈운하의 국유화선언은 그때까지 구미 열강에 억눌려 있던 아랍권 국가에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수에즈운하 중간에 해당하는 곳이 이스마일리아시. 이곳은 휴양지로 개발돼 분위기가 여타 이집트 도시와는 다르다. 해마다 대순례(하지)철이면 메카를 찾는 이슬람신도로 붐빈다. 운하 완성자인 프랑스인 페르디낭 마리 드 레셉스가 살았던 아름다운 유럽풍 저택도 이곳에 있다. 안내판조차 없는 옛집을 겨우 찾아갔으나 유럽계로 보이는 집주인은 정원만 보고 가라며 쌀쌀맞게 대했다. 정원에는 운하공사를 독려하며 그가 타고 다녔던 마차 한 대 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카이로대 아시아연구센터 모하메드 셀림소장▼

“아랍국가의 힘은 석유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집트의 명문 카이로대학의 아시아연구센터 소장인 모하메드 셀림 교수는 ‘경제력은 곧 힘’이라는 흔한 판단을 거부했다. 비록 석유가 나오기는 하지만 물량이 많지 않아 거의 수출하지 않고 있는 이집트를 예로 들었다.

“이집트의 힘은 외교 전략, 이집트 사람, 문화와 문명에서 나온다고 믿습니다.”

그는 이집트가 ‘아랍의 맏형’으로 중동분쟁 해결을 위한 평화의 중재자로 나설 수 있는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다트 대통령 이후 지켜온 평화주의 외교 노선, 의사와 엔지니어 등 우수한 인력 보유, 이슬람권 문화시장을 장악하다시피 한 책 영화 연극 TV프로그램 잡지 등의 공급기지 역할이 이집트의 힘의 원천이란 설명이었다.

“문화가 다르다는 것이 곧바로 국가간의 전쟁이나 충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또 문명권을 달리한 채 유혈충돌을 거듭하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향후 관계를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해법은 이미 국제사회가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1967년 11월 유엔 결의안 242호의 결정에 따르면 기본적인 문제는 해결된다고 믿습니다.”

‘6일전쟁’으로도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 후 나온 이 결의안의 핵심은 아랍 점령지로부터의 이스라엘군 철수, 모든 국가의 주권 존중과 영토보존, 난민문제 해결이었다.

“국제사회는 유대인의 생존권과 함께 팔레스타인 난민문제 해결을 위한 국가건설을 약속했습니다. 이스라엘도 이 같은 국제사회의 뜻을 저버리지 않기 바랍니다.”

서로 다른 문명이 각기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면 양보가 불가피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hans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