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민씨가 아버지 사진을 보며당시의 모습을 회상하고 있다.
‘우리 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납북자들이 저만큼만이라도 살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69년 12월 피랍된 강릉발 서울행 대한항공 여객기의 여승무원 성경희씨가 32년 만에 어머니를 만나던 모습을 지켜보던 유한민(柳漢旻·43·서울 노원구 중계동)씨의 마음은 복잡했다.
유씨의 아버지 유병하(柳炳夏·69)씨는 당시 납북된 여객기의 기장이었다. 북한 당국이 북에 잔류했다고 발표한 11명 중 한사람.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유씨는 사건이 터진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집 앞에 줄지어 늘어선 고급차들, 사람이 꽉 들어찬 마루, 그리고 들어 누우셨던 어머니. 어머니를 더욱 아프게 했던 건 몇 년 뒤 찾아온 중앙정보부 요원의 한마디였다.
“남편은 지금 북에서 재혼해서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함께 살고 있는 유씨의 어머니는 그 이후 아버지 얘기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상봉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 유씨는 당시 한 라디오 프로에 나가 “아버지를 돌려달라”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당신의 순번도 아니었는데 급작스레 다른 기장의 병가로 그 비행기를 탔던 아버지의 운명이 야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아버지와 아들로서 만나고 싶을 따름이다.
“성경희씨가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면 우리 아버지라고 왜 안되겠습니까? 이제 제발 남북 정부 모두 이산가족 상봉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생각은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저 자식된 도리를 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아버지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지금 당장이라도 만나러 달려가고 싶군요.”
피랍된 아버지의 현재 법적 상태는 ‘실종’. 사건 당시 살던 용산구 동부이촌동에는 아버지의 주민등록이 말소되지 않고 남아 있다. 지난해 4월 총선 때도 어김없이 투표용지가 나왔다.
“어떤 나라는 전사자 뼈까지 찾아주겠다고 하는데…. 우리 정부가 조금이라도 납북자 가족의 아픔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이산가족의 상봉을 TV로 지켜보는 유씨는 속으로 피눈물이 흐르는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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