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한민족을 격분시켜 독립기념관을 건립하게 했던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의 광풍이 다시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그 시대착오적 성향은 일본 사회의 총체적 우경화 경향을 연상시킬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다.
일본의 역사왜곡의 광기는 이미 지난 해 11월 출판된 니시오 간지(西尾幹二·전기통신대 교수)의 '국민의 역사'가 선풍을 일으킬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 역사왜곡은 18년 전과 비교하면 일본의 정·관·재계와 민간이 조직적이고 입체적으로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우려스럽다.
일찍이 1996년 자민당 우파는 '역사검토위원회'를 발족해 역사왜곡의 시나리오를 짰고, 그해 8월 문부상이던 마치무라는 "국회 답변에서 근현대사 부분이 편향됐다"며 이른바 '자학사관(自虐史觀)'에 의해 씌여진 교과서를 검정 이전에 수정하겠다는 점을 강하게 시사했다. 자민당과 문부성의 '음모설'이 제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본의 경제 4단체도 1998년 경영자를 상대로 한 역사강좌에서 역사왜곡을 주도하는 극우파 조직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회원을 강사로 초빙, 동조하고 나섰다.
교과서를 저술해 이번에 검정 신청까지 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사관은 회장인 니시오 간지의 저술을 통해 '국수주의적이고 쇼비니즘적'이라고 천명된 바 있다. 이번 교과서 왜곡의 주요내용을 두고 그들은 '자학사관'에 의해 잘못 기술된 부분을 '공정'하게 바로잡은 것이라고 강변한다. 남의 나라 교과서 기술에 참견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고 한다.
1997년 8월 29일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에서 내린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전 도쿄교육대 교수)의 이에나가 교과서 검정 소송 판결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문부성의 교과서 왜곡 검정에 맞서 32년간 외롭게 투쟁한 노학자의 집념도 그렇거니와, 부분적이긴 하지만 일본 사법부가 교과서 검정의 불법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오노 마사오(大野正男) 재판장은 '개별 의견'을 통해 "역사를 왜곡하는 나라는 언젠가는 망한다"고 판시했다. 또 이에나가는 "역사적 진실이 정치적 논리로 왜곡돼서는 안되며 역사기술에 권력이 개입하면 안된다"고 소감을 밝힌 바 있다. 그 판결문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더욱 왜곡된 역사 교과서가 나타나고 있는 현실이다.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 중국 북한이 강도 높게 비난한 데 비해 우리 정부의 대응은 매우 미온적이었다. 사정이 있는지 모르나, 외교나 경제문제와 역사왜곡은 사안이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결론이 나기 전에 마땅히 강력히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 그래야만 선린 이웃으로서 미래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교과서의 역사왜곡은 한일간의 과거사가 종료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검정결과를 주시해야 할 것이다. 야밤에 개가 아무리 휘영청 밝은 달을 보고 짖어대도, 달은 개의 그림자를 만들며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박유철(독립기념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