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위에 ‘정치법’, 그 위에 ‘떼법’이 있습니다. 떼를 쓰면 안 되는 것이 없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한 국책연구소 부서장은 눈앞의 이익을 앞세우는 주민들이 국토이용의 비효율성을 증폭시킨다고 지적했다. 끊임없이 집단민원을 제기하면 정치인들이 결국 해결해 준다는 것.
97년 환경부는 두루미 등 희귀 철새 도래지인 강원 철원평야를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하려다 실패했다. 주민들이 “군사시설보호법으로 인한 피해도 큰데 또 족쇄를 채우려느냐”고 강력히 반발해 물러나고 말았다.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되면 토지형질변경과 각종 건축행위가 금지된다.
당시 이 계획을 추진했던 가톨릭대 조도순(曺度純·생명과학부)교수는 “사실 강하게 반발했던 사람은 현지인보다는 땅을 사놓았던 외지인”이라고 귀띔했다. 90년대 초 북방외교 이후 민통선지역에 불어닥친 투기 열풍으로 이곳 토지의 절반 가량은 외지인 소유가 됐고 이들이 투자이익을 노려 개발 규제에 결사적으로 반대한 것이다.
▼글 싣는 순서▼
1. 정치논리에 춤추는 개발
2. '누더기' 법과 제도
3. 불도저 동원=시장 당선?
4. 일단 파헤쳐야 조직이 산다?
5. 밀어붙이면 되더라-국민도 책임
6. 크게 보자, 멀리 보자
우리나라는 국민총생산 대비 땅값의 비중이 미국의 5배, 유럽의 3배에 이른다. 또 땅의 시세 차익은 고스란히 소유자에게 돌아오므로 투기와 고밀도 개발의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
환경정의시민연대 박용신(朴勇信) 부장은 “택지개발이 확정되면 땅주인은 바로 땅을 팔아 시세차익을 챙기고 난개발의 피해는 멋모르고 입주한 주민들이 보게 된다”고 말했다.
99년 11월 김명자(金明子) 환경부장관은 낙동강 수계의 국민에게 편지를 띄웠다.
‘오염된 강을 살리는 일에 힘을 모으기보다 물을 둘러싸고 서로 반목하는 게 우리 현실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피력한 이 편지는 낙동강 물관리 종합대책안의 영남지역 공청회가 무산된 직후 발송됐다.
수량 부족과 공단 난립으로 낙동강 수질은 3급수로 전락한 지 오래지만 상류 주민들은 대구 위천공단 조성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특히 경남 산청 함양군 등지에 계획했던 갈수조절용 댐은 지역주민 반발로 백지화됐다. 상수원이 되면 각종 시설 규제가 늘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 하지만 최근 낙동강 민간조사단의 조사결과로도 기존 댐만으로는 수질 개선이 어렵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주민의 이기심은 지방자치단체의 개발드라이브에 이용되기도 한다. 케이블카 사업은 당장 수익이 나지만 생태계에는 치명적인 영향을 미쳐 환경단체의 반발이 심한 것이다.
이럴 때 ‘등장’하는 것이 주민 여론조사 결과. 전남 영암군은 월출산 케이블카 설치를 강행하고자 여론조사를 벌여 78.1%의 찬성을 끌어냈고 전국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킨 제주도 한라산 케이블카에도 50.2%의 주민이 찬성표를 던졌다.
이달 1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릴 예정이던 경기 성남시 판교신도시에 관한 토론회는 주민의 난입으로 무산됐다. 주민들은 “26년간 재산권을 제약받은 당사자를 제쳐놓고 당신들끼리 무슨 토론회냐”고 외쳤다.
판교개발추진위원회 김대진(金大進·성남시의원)위원장은 “용인 수지 광주는 놔두더니 왜 판교를 가지고 난리냐”고 정부를 비난했다. 용인이나 광주에는 상수원보호구역까지 개발됐는데 개발제한구역도 아닌 판교의 개발을 머뭇거리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 더구나 98년 개발예정지로 승인된 뒤 투기바람도 불었던 터라 정책 혼선으로 땅값이 급락한 지금 빚독촉에 시달리는 주민이 많다고 주장했다.
환경운동연합 김정수(金正洙) 환경정책국장은 “주민들이 정부 정책의 일관성을 믿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국군기무사령부를 우면산으로 이전하려는 계획에서 보듯 개발제한구역을 정부가 스스로 무시하고 있고 국립공원 안에 들어선 취락도 올해 실질적인 개발권을 인정받았다.
환경정의시민연대 서왕진(徐旺鎭) 사무처장도 “개발제한구역 해제를 97년 대통령 공약으로 넣기 위해 토지소유자들은 로비와 협박을 일삼아 결국 뜻을 이뤘다”고 말했다. 원칙없는 국토행정 아래에서 ‘내 몫’을 포기할 주민은 없다.
▼국토지킨 집단민원▼
주민의 집단민원이 항상 국토를 망치는 것은 아니다.
환경영향평가제가 실시된 81년 이후 처음으로 지난해 11월 경기 용인시 신봉지구에서 “사업자는 잘못된 평가결과에 따른 산림 훼손을 원상복구하라”는 지자체의 명령이 내려졌다. 이 결정을 이끌어낸 사람들은 다름 아닌 인근 주민들.
경기 용인시 수지지구 주민들은 지난해 8월 광교산 자락인 앞산의 나무가 베이는 것을 보고 “약수터와 산책로가 있는 휴식처가 망가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의견을 모았다.
주민들은 총 5027명의 서명을 받아 관계 당국에 재조사를 요구했고 학계와 시민단체를 찾아다니며 지원을 호소했다. 결국 환경부는 재조사 끝에 “개발해도 되는 숲이라는 토공의 환경영향평가는 잘못됐다”는 판정을 내렸고 토공은 훼손된 숲을 복원하고 신봉지구 시설계획을 다시 하는 부담을 지게 됐다.
주민 대표인 박진우(朴鎭宇·61·무역업)씨는 “숲 복원이 제대로 될 때까지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을 것”이라며 현재 자문교수단까지 구성했다고 기염을 토했다.
환경운동연합 서형원(徐炯原) 환경조사팀장은 “주민들이 이기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난개발을 막아내는 경우도 많다”며 “주민은 무분별한 국토행정의 최대 피해자인 만큼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일단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정성희차장(팀장·이슈부)
신연수 구자룡기자(경제부)
정용관 황재성 이은우 김준석기자(이슈부) 이훈구기자(사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