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동쪽의 어촌 도시 보렌담. 지난주 화요일 이 곳의 작고 좀 어두우며 찬바람이 도는 축구경기장에서는 주위를 환하게 하는 환상적인 일이 벌어졌다. 네덜란드축구를 대표하는 몇몇 스타플레이어들을 배출했던 이 도시에서 뜻깊은 자선 축구경기가 펼쳐진 것.
1980년대부터 1990년 초반까지 네덜란드축구를 대표하던 프랑크 레이카르트와 루드 굴리트, 마르코 반 바스텐 등이 한 팀을 이뤘고 20년 전 정교한 패스로 이름을 날렸던 아놀트 뮤렌 등 기라성 같은 스타플레이어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야말로 환상의 축구경기 한판을 벌인 것. 좀처럼 한자리에 있기 힘든 이들이 모인 것은 200여명의 청소년들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자선경기를 갖기 위해서였다.
이 청소년들은 새해 아침 보렌담시의 한 식당에서 일어난 화재로 비록 목숨은 건졌지만 심하게 부상한 생존자들. 이 대형화재로 15명이 숨졌고 40명은 구조는 됐으나 언제 생명을 잃을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리고 230명은 심한 화상으로 일상생활이 힘든 상태.
보렌담시는 이들을 위해 축구장 본부석을 헐고 부상자 치료를 위한 재활의료원을 지을 계획을 세웠고 평소 엄청난 수입을 올리면서도 남을 돕는 일에는 인색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던 축구스타들이 적극 동참한 것.
이 뜻깊은 일을 위해 시간을 내 달려온 스타 중 가장 눈길을 끈 선수는 은완코 카누. 95년 네덜란드 아약스팀에서 뛰면서 유럽 챔피언스리그를 제패했고 나이지리아 대표선수로 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던 그는 경기 후 한편의 글을 낭독해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어릴 때 나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내 몸에 이상이 생기면서 희망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로 시작되는 글을 읽는 동안 관중석은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했다.
카누는 특별한 선수다. 그는 상대 선수를 마법에 홀린 것처럼 흐트러지게 만드는, 천부적이며 독특한 축구기술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축구기술보다는 시련을 이겨낸 강한 정신의 소유자로 더 칭송받고 있다.
올림픽 우승 직후 그는 심장에 이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선천적으로 심장판막에 이상이 있다는 것이었고 축구선수인 그에게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진단이었던 것.
이런 이유 때문에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아직도 병원에 입원해 있거나 살균 호흡기를 단 채 경기장을 찾은 30여명의 환자들에게는 더 큰 감명을 줬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여기에 이처럼 서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내준 격려와 사랑 덕택에 나는 강한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카누가 글을 읽어가는 동안 선수들과 관중 그리고 다친 몸을 이끌고 경기장을 찾은 청소년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카누는 수술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진단이 내렸을 때의 충격과 이를 정신력으로 이겨내고 다시 그라운드에 설 수 있었던 과정을 담담하게 얘기했다.
이날 자선경기는 화재 현장에서 살아남은 축구전문 작가인 자프 데 그루트가 기획한 것. 이날 자선경기에 출전한 축구스타들은 자신의 생애 중 가장 큰 뭔가를 했다는 듯한 뿌듯한 표정이었고 이날 밤은 희망이 가득 넘쳤다.
카누의 마지막 낭독문 또한 그러했다.
“사랑을 주세요. 그리고 강한 정신력을 가집시다. 그러면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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