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무렵, 난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혀 집안에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막 대학생이 된 형은 그 생각이 그럴 듯하다고 느꼈는지, 내 포부를 사칭하고 다닌 걸 난 안다. ‘훌륭한 영화감독이 되세요’ 어쩌구 하는, 미팅에서 한번 만났을 게 뻔한 여학생이 보내온 엽서를 본 적이 있어서 하는 얘기다.
내가 대학생이 된 봄 어느 일요일, 형이 감독에의 꿈을 버리지 못한 나를 데리고 극장 순례를 하던 일은 아직도 기억에 또렷하다.
형은 동생을 데리고 시내에 간다. 우리는 명보극장에서 ‘바람 불어 좋은 날’표를 사고 바로 뒷길로 국도극장엘 간다. 시간이 빠듯하지만 우린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표를 마저 사고 다시 명보극장에 돌아가 자리를 잡는다.
옆자리에 앉은 아가씨들이 킬킬대며 말을 걸더니 설탕에 절인 마른 생강을 한 웅큼 집어준다. 촌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우리 형제는 정중하다. 우린 대충 먹다가 어두워진 틈을 타 손바닥에 있는 걸 버리고 영화에 몰두한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오랫동안 타의로 영화를 찍지 못했던 이장호 감독의 재기작이다. 국산영화가 이렇게 세련되고 재미있으면서도 지적일 수 있다니….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난 국산 영화 감독이 되어도 되겠다, 창피(?)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맨 마지막 씨퀀스. 말더듬이 짜장면 배달부 안성기가 권투를 시작한다. 정신없이 얻어맞으면서도 계속 실실 웃음을 흘린다. 우린 그때쯤 자리에서 일어나 극장입구 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곤 영화가 끝나자마자 잽싸게 국도극장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잭 니콜슨이 나온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영화를 본다. 상처 입은 영혼들, 그들을 옥죄는 비인간적인 시스템, 그 시스템에 저항하는 인간, 그 저항의 비참한 말로.
그렇지만 그 작은 저항이 불씨가 되어 누군가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다. 사실 난 이날 부로 영화감독이 진짜 되겠다고 결심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미 만든 영화 두 편도 그렇지만 앞으로 만들 영화들도 이날 본 두 영화의 정신에서 크게 벗어 날 것 같지가 않다.
우린 영화를 본뒤 명보극장 맞은 편 골목 속에 숨어있는 강서면옥엘 갔다. 독특한 향취가 나는 갓김치를 반찬으로, 장조림 간장으로 간을 맞춘 듯한 맑은 육수의 냉면을 먹었다. 그날 형과 영화에 대해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우린 그저 집으로 돌아와 나란히 누워 잤을거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명보극장은 아시다시피 멀티플렉스로 전환된지 꽤 됐고, 국도극장은 작년에 헐렸다. 강서면옥은 언젠지 모르지만 거기서 사라졌고, 형은 춘천에서 네 아이를 기르며 살고 있다. 형 본지도 꽤 오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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