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방송계의 화두는 단연 도올입니다. 기독교 단체와의 마찰이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서지문 교수의 시청평이 매주 일간지에 실리고 있고, 또 도올의 강의 내용과 방식을 비판하는 동양학 연구자들의 좌담까지 열렸습니다. 그 와중에도 도올의 논어 강의는 놀라운 시청률을 자랑하고 있으며 새로 펴낸 교재 2권도 베스트셀러가 되었군요.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도 작년 내내 화제였습니다. 생태학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자급자족농으로 만년을 보낸 이 사상가의 삶이 주목받은 것이지요. 류시화 시인에 의해 '조화로운 삶'이 번역되었고 스콧 니어링보다 21년이나 어린 아내 헬렌 니어링의 자서전('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까지 선을 보였습니다.
도올과 스콧 니어링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학창 시절 열심히 공부하여 모교의 대학교수가 되었다는 점, 이런저런 이유로 대학교수에서 물러났다는 점, 자신의 사상을 가르치기 위해 대학 밖에 대안학교를 만들었다는 점, 강연과 저술에 힘을 쏟았다는 점, 자본주의적인 삶의 방식과는 다른 길을 모색했다는 점 등입니다.
물론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기도 합니다. 스콧 니어링은 철저한 사회주의 신봉자였고 도올은 동양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자신의 삶을 자리 매김 한다는 점이 우선 지적되어야겠지요. 그보다 더 재미있는 차이는 방송매체에 대한 관점의 차이입니다. 스콧 니어링은 방송매체의 발달이 진정한 강연과 토론을 소멸시켰다고 개탄하였지요. 방송이 발달하기 전, 그러니까 19세기와 20세기 초에는 밤이면 극장이나 공공장소에 모여 강연을 듣고 토론을 하던 대중들이 방송매체가 발달하면서 저마다 문을 꼭꼭 잠그고 텔레비전 앞에만 앉아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콧 니어링은 이를 '커뮤니케이션의 암흑시대'로까지 평하면서 국민들의 이성적 사고를 마비시킨 주범으로 방송매체를 몰아세웁니다. 대학에서 쫓겨난 후 그가 줄곧 방송매체에 의지하지 않고 기차나 비행기를 이용하여 머나먼 강연 여행을 다닌 것은 새로운 문명에 대한 거부감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러나 도올은 스콧 니어링이 그토록 싫어하던 텔레비전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전에도 김동길이나 이어령 같은 분이 텔레비전을 통해 강의를 한 적은 있지만 도올처럼 전면적이고 장기적이지는 못하였지요.
'논어'라는 동양의 고전에 대한 천착보다 신상발언이나 현대사회에 대한 입장 표명이 너무 많다는 비판이 거셉니다. 아예 도올의 강의를 하나의 쇼로 폄하하기까지 하지요. 그러나 저는 도올의 바로 그 쇼맨쉽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텔레비전에 등장한 도올은 '논어'의 주석자나 연구가를 넘어 서서, '논어'를 통해 과거를 되살리고 현재를 관찰하며 미래를 상상하는 소설가로 말하고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물론 도올의 의도적인 도발이겠지요.
천일야화처럼, 도올의 이야기는 시공을 초월하여 끝없이 펼쳐집니다. 공자의 삶에서 국악의 대중화 문제를 살피거나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서 인(仁)의 본질을 거론하면서, 도올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엮고 부풀리고 비교합니다. 어떨 때는 괴테와 베토벤과 헤밍웨이를 병치시켰던 '불멸'의 쿤데라 같기도 하고 어떨 때는 비참한 라틴아메리카의 현실과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설화의 행복을 백 년 단위로 사유한 '백 년 동안의 고독'의 마르께스 같기도 합니다. 솔직히 도올의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능력이 제게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바람난 아줌마 이야기나 마약에 찌드는 젊은이들 이야기로 넘쳐나는 소설판에 도올 같은 탁월한 이야기꾼이 나타난 것이 놀랍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높은 시청률도 물론 이런 요소들 때문이겠지요.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며 대중들을 웃겨다 울렸다 하는 것이 입심 좋은 소설가의 본령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야기의 향연을 펼치며 도올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얻으려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지난 백 년 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자본주의적 삶과는 다른 삶입니다. 일찍이 스콧 니어링은 '민주주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자본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했었지요. 스콧 니어링과는 사상이나 방식이 다를지라도, 도올은 공자를 통해 지금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삶과는 다른 삶의 양식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도올은 과연 텔레비전 강의를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걸어온 길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을까요, 아니면 스콧 니어링이 그토록 경멸했던 바보상자에 투항한 지식인으로 남을까요?
아직 그의 모험은 끝나지 않았고, 금요일 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이 지식인 소설가의 분투를 지켜볼 따름이지만, 만에 하나 실패하더라도 그의 모험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겁니다. 지금 그는 서태지 만큼이나 전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