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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지금,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입력 | 2001-03-02 18:47:00


◇지금,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2권), 이순원 장편소설, 청어 펴냄

소설가 이순원이 10년만에 독자와의 약속을 지킨 작품. 92년 ‘그곳엔 비상구가 없다’를 내면서 예고한 속편이 전편과 함께 묶여 나왔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관심은 전편에서 자본주의의 타락한 욕망을 테러로 응징했던 작가의 급진적 관점이 10년간의 시차 동안 어떻게 변모했는지로 모아진다. 90년대 중반 ‘수색, 그 물빛 무늬’를 기점으로 낭만주의적 순수성으로 급선회해 ‘압구정동식 욕망’에서 너무 멀어진 그가 아닌가.

이같은 긴장과 기대는 2부를 펼치는 순간 쉽게 풀린다. 속편은 전편이 이득지란 소설가의 ‘압구정동’이란 작품이라고 설정함으로써 전편을 변주하기 때문이다.

속편은 소설 ‘압구정동’이 나오고 몇 해 뒤 작가가 의문의 독자 ‘T’로부터 전화를 받는 것에서 시작된다. ‘T’는 소설에 등장하는 타락한 ‘압구정 인간’들을 응징하겠노라고 경고하고, 나이트클럽의 무희인 여대생 등이 줄지어 살해되면서 현실화된다.

전편의 동어반복을 피하려는 듯, 속편은 살해당하는 이들의 패덕함이나 살해하는 자의 정당함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대신 테러가 소설의 모방범죄임이 밝혀지고 나서 냄비 끓듯 흥분하는 여론의 반응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소설이 ‘왜곡된 욕망을 만들어내는 체제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한 ‘T’의 실제 테러는 10년 전 소설 속 테러보다 위협적이지 않다. 극단적인 경고가 사회에 먹혀들지 않자 눈보라 속에 조용히 사라지는 뒷모습이 오히려 애처롭다.

이것은 혹시 ‘압구정동’이란 응징의 과녁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90년대초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유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으로 가야 한다6’)에서 생산된 댄디들의 집합소가 지금은 강남 학생들이 모이는 저잣거리가 되었기 때문일까.

diga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