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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차현숙/흙냄새나는 옛집이 그리워

입력 | 2001-03-04 18:55:00


“나는 말이야, 이 다음에 시골로 내려갈 거야. 불편하더라도 널찍한 마당이 있고, 그 마당에 줄을 길게 매 쨍쨍한 햇볕 속에 빨래를 널 수 있는 집 말이야.”

요즘 들어 친구나 친한 사람들을 만나면 가끔 이런 말을 하곤 한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 얼굴은 웬 빨랫줄(?) 하며 황당한 표정으로 바뀐다.

“넌 그런 집에서 못살아. 나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이미 편리한 것에 길들여졌는데 어떻게 그런 집에서 살 수 있겠니?”

결혼하고 첫 살림을 시작한 곳이 아파트이다. 한 해 뒤 그 옆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가 거기서 아이를 낳고, 길렀다. 그리고 두 차례 이사한 지금도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햇수로 16년째이다.

처음엔 수도꼭지만 틀면 뜨거운 물이 나오고, 관리비만 내면 별로 힘들 일 없이 살 수 있는 아파트가 좋았다. 아파트가 아닌 집에선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가끔 여행을 떠나 시골집에 머물 적에도 하루나 이틀을 못 견디고 빨리 서울에 있는 아파트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파트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런 시멘트 공간에서 내 아이가 자라는 것이 끔찍하게 생각됐다. 14년 전 아파트에서 태어난 내 아이는 앞으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아파트에서 살다 결혼해 아파트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살아갈 거다.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멍멍해진다. 아파트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 생을 마치는 삶이라니….

나는 어린 시절에 채송화, 분꽃, 나팔꽃이 피는 작은 마당이 있는 집에서 자랐다. 나만이 아니라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거의 그런 집에서 유년기를 보냈을 거다. 봄이면 꽃씨를 땅에 심고, 비가 오고 난 뒤에 연초록의 싹이 땅 위로 솟아오르는 걸 보며 신기해 하고. 작은 꽃잎들이 피어나기를 기다리며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맨 먼저 마당으로 달려간 경험 같은 게 있을 거다. 또 비가 오는 날이면 쪽마루에 누워 빗소리를 들으며 포근한 잠 속으로 빠져들고. 그때 가슴으로 밀려오는 흙 냄새란….

아파트가 싫어지면서 부쩍 어릴 때 살던 집과 마당이 그리워진다. 작고, 불편하고, 옹색한 집이지만 그 곳에는 땅이 주는 정서가 있었다. 어릴 때 그런 따뜻한 추억이라도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작은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당, 골목길, 담 위로 피어난 장미꽃, 햇볕에 뽀송뽀송 말라 가는 빨래 냄새….

그래서 그런지 요즘 나는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단독주택단지로 산책 나가는 것을 즐긴다. 꽃과 풀이 있는 남의 집 마당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꼭 저런 집에서 살아야지 하는 바람을 갖는다. 그리고 내 아이가 이런 추억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해 걱정도 하면서 주택단지의 골목을 몇 번씩 돌아다닌다.

정작 아이는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와 어긋나기 일쑤다. 작년 여름에 아이를 데리고 단독주택단지로 산책을 갔을 때다. 흙과 꽃과 풀이 있는 마당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엄마는 어린 시절에 저런 마당에서 꽃도 심고, 꽃씨도 받고 했단다. 엄마가 제일 재미있게 시간을 보낸 곳도 저 마당에서야. 그러니깐 네가 집에 오면 맨 먼저 컴퓨터 책상에 앉아 메일 온 것이 없나 살펴보는 것처럼 엄마는 마당으로 가 새로 피어난 꽃들이 없나 하고 마당에서 몇 시간씩을 보냈어. 엄마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어.”

아이는 금방 기겁을 하며 절대로 그런 집에서 살지 않겠다고 한다. 아이는 깨끗하고, 편리한 아파트가 좋기만 하다며 이사가려면 엄마 혼자 가라고 한다. 아이에게 집이란 오직 아파트일 뿐이다.

아파트에서 사는 우리 아이들은 땅에 대해 어떤 추억이 있을까. 시멘트로 땅을 덮어버린 길, 그 위로 달리는 차들, 공중에 떠 있는 집, 베란다에 놓여진 화분 속의 죽은 흙과 생기 없는 화초들. 그리고 단지 안에 조성된 놀이터의 모래….

땅을 밟고 살 수 있는 삶이 그리워진다. 대지를 적시는 낭랑한 빗소리에 시간마저 잊고 싶다. 종일토록 생명을 실어오는 흙도 만지고 싶다. 봄이 온다. 우선 컴퓨터에 빠져 있는 아이의 손을 잡고 가까운 산에라도 가야겠다.

차현숙(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