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제조업이 흔들리고 있다. 선진국 제품에 비하면 품질이 갈수록 밀린다. 후발 개도국 제품과 비교하면 가격경쟁력이 뒤쳐진다. ‘메이드 인 코리아’의 품질수준을 추격하는 후발개도국의 속도가 만만찮다. 외환위기 이후 연구개발투자를 소홀히 한 탓이다. 한국 제조업의 현주소를 짚어보고 대안을 찾아본다.
5일 오전 인천 동구 송현동 인천제철 공장. 힘든 공정을 마치고 선적을 기다리는 형강 완제품들이 작은 산을 이루며 쌓여 있다.
이제 물건을 팔아 자금을 회수하는 일만 남았는데도 임원 A씨는 연방 한숨을 내쉰다. “100t을 수출해도 원료비와 운송비 등 이런 저런 비용을 빼고 나면 3000달러 남는 게 고작입니다. 제품의 부가가치를 높이려면 연구개발(R&D)에 과감히 투자해야 하지만 자금 사정이 따라주지 못하고….”
생산물량 기준으로 세계 6위의 철강대국임을 내세우는 한국 철강산업. 하지만 현장에서 확인한 전망은 그리 밝지 않았다.
국부(國富)의 원천인 제조업이 눈앞의 현안 처리에만 급급한 근시안적 산업 정책과 기업들의 투자 및 연구개발 기피가 맞물려 속으로 병들어가고 있다.
▽한국 제조업의 참담한 성적표〓한국이 세계시장에서 상위 5위권에 드는 제품의 수는 94년 555개에서 99년 482개로 줄었다. 94년 82개였던 경쟁력 1위 제품도 97년 69개까지 떨어졌다가 99년 76개로 소폭 회복되는 데 그쳤다.
반면 경쟁국인 중국은 1∼5위 제품 수가 94년 1307개에서 99년 1428개로 121개가 더 늘었다. 한국이 밀려난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는 분석.
한국 일본 중국 등 동북아 3국간의 경쟁력을 비교해보면 한국의 후퇴 양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한국이 비교대상 수출 품목 3506개 가운데 일본과 중국에 우위를 보인 품목은 각각 870개(24.8%)와 1123개 품목(32.0%)에 불과하다.
▽비상걸린 기업들〓제조업 현장에서는 요즘 “선진국과 후발국 사이에서 협공 당해 옴짝달싹 못할 지경”이라는 푸념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판매단가가 낮아져 손해보고 팔아야할 판”이라는 아우성도 높아지고 있다.
현대자동차 미국법인 관계자는 “2년전만 해도 차 한 대를 팔면 250달러 이상 이익을 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중형차를 팔아도 150달러를 남기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메이드 인 코리아’는 이제 품질과 가격, 브랜드 이미지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게 없는 3류 상표로 추락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됐나〓전문가들은 세계 시장의 판도변화에 둔감해 앞날을 내다보는 산업정책을 마련하지 못한 정부와 살아남는 데만 치중해 설비투자와 R&D에 소홀한 기업의 공동 책임이라고 지적한다.
잦은 규제와 조사로 기업들의 투자의욕을 위축시킨 것도 중요 요인으로 꼽힌다.
제품의 부가가치를 높이려면 당연히 신기술과 신제품을 개발하는 데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R&D에 쓰는 돈은 미국 일본 등에 비해 매우 미미한 수준. 지난해 한국의 R&D 투자 20대 기업의 투자 규모는 5조9000억원으로 일본 마쓰시타(松下) 전기산업 1개사의 1년간 R&D 금액 5조6595억원과 비슷하다.한 대기업 임원은 “자금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기초기술 수준이 워낙 열악해 실패 위험부담이 큰 첨단제품 개발에는 주저하게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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