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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윤사순/역사왜곡서 보는 일제망령

입력 | 2001-03-07 18:38:00


요즈음 일본 역사교과서의 사실 엄폐, 진실 왜곡에 대한 우리의 충고를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주권침해라면서 일축하려 든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시하는 것은 그들의 국어교재나 수학교재가 아니라 역사교재이고, 역사교재를 문제시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와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당시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을 침략해 강점했다. 이것이 엄연한 사실인 이상, 사실대로 인정하고 반성하고 사죄하는 것이 역사에 임하는 바른 태도일 것이다.

그러한 반성적 태도가 일본의 패망사관 피해사관이라고 하여 유혈정복을 무혈진출로, 이기적 강탈을 이타적 보호라는 식으로 왜곡하는 것은 한낱 제국주의 사고의 부활일 뿐이다. 그들의 제국주의 사고는 그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고, 이웃 나라에 대한 재도발의 준비이고 시작이며 우리에 대한 위협에 해당한다.

과거 저들은 한국을 침략하면서 어용학자들을 동원해 악의적이고도 음모적인 식민지사관을 조작해 냈다. 철학사상을 전공한 필자로서는 요즈음 저들의 저와 같은 작태를 보면서, 그 식민지사관과 유사했던 한국사상 부재론 조작의 악몽을 떠올린다.

일인 어용학자들은 한국에 언어 문자 풍습 등 독자적인 문화가 있고, 그 문화와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뒷받침한 한국사상이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국사상 부재론을 강변했다.

그 하나의 예로 든 것이 한국유학에 관한 그들의 주장이다. 그들 역시 당시까지 한국유학을 대표하는 학자로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드는 데는 일단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의 견해로는 퇴계나 율곡의 사상에 독창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퇴계가 주희 사상 이상으로 심오한 이론(이기호발론·理氣互發論 등)을 낸 것이라든가, 율곡이 독특한 이론(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 등)을 제창한 끝에 100년 후쯤 성인이 나오더라도 나의 이 이론은 고치지 못한다고 단언했던 창의성들을 엄폐하고 외면했다.

그들은 퇴계나 율곡의 독창적 이론세계를 호도하고 무시하기에 급급했다. 당시 일인들은 오늘날에도 국제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이들의 사상을 부정함으로써, 한국사상 부재론의 억지 근거를 삼았다.

그 목적은 물론 한국인이 자율적 생활능력과 자주적 역사개척 능력을 소유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려는 데 있었다. 한민족을 허상화하고, 이를 통해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식민사관과 맥을 같이하는 작업이었다.

물론 일본에도 양심을 속이지 않으려는 학자들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늘날 소수의 그 양심적인 학자들의 외침이 수포로 돌아가는 풍토를 보면서, 저 나라가 끝내 이성적인 문화대국이 되기 어려움을 보는 것 같아 일말의 연민의 정을 느낀다.

우리의 이웃이 진실로 인도주의에 기초한 문화대국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 마지않는다. 그 우정어린 일본의 벗들에게까지 이런 글을 띄우게 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윤사순(고려대 교수·민족문화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