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처음 온 외국인들은 종종 나에게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묻곤 한다. 이 나라에서 운전하기가 어떠냐고. 그럴 때마다 나는 한마디로 설명해준다. 지구상에 이런 곳은 다시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의아해하다가 내가 겪은 경험담들을 듣고 나면 금방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양보운전'의 '양'자도 몰라▼
어느 날 내가 타고 가던 택시가 버스와 가볍게 부딪치는 사고가 났다. 양쪽 운전사는 서로 과실이 없다는 듯 아주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동시에 차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차도 한복판에 버티고 서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고성을 질렀다. 때로는 욕설도 퍼부어 대면서. 뒤따르던 차들은 순식간에 긴 행렬을 이루며 멈춰서고 아무도 이 두 사람을 제어하지 못했다. 이윽고 경찰관이 다가와 딱지를 끊으려고 했을 때 두 사람은 갑자기 경찰관을 공동의 적으로 삼아 삿대질을 하고 분노를 표시했다. 한국의 운전 규범에 ‘양보’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운전자들은 대개 자신에게 우선권이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한국에서 보행자는 보행권이 없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은 위험물을 피하기라도 하 듯 종종걸음치거나 뛰곤 한다. 보행자 신호를 뻔히 보고도 적신호를 뚫고 차를 몰아대는 것은 가장 악질적인 교통위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를 일상적으로 저지르고 있는 것이 한국의 보통 운전자들이다. 언젠가 내가 운전 중에 신호대기에서 멈춰서 있으니 뒤에 서있던 차의 운전자가 경적을 울려댔다. 뒤를 돌아보니 뭐라고 욕설을 하며 주먹을 들어 몸짓을 해대는 것이었다. 어쩌란 말인가. 한번은 같은 상황에서 차에서 내려 내 차 앞 유리창을 주먹으로 쾅쾅 치는 운전자도 있었다. 교통신호를 지키느라 움직이지 않는 내 차 때문에 자기가 신호를 위반할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에 매우 분노하는 표정이었다. 등교 길 어린이가 막 건널목을 건너기 시작한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나는 한국인들이 얼마나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 등하교 길에서 이렇게 아이들을 일상적으로 위험에 빠뜨리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복잡한 대로에 이중 삼중으로 노상 주차를 해도 교통경찰관들은 그저 보아 넘기기 일쑤다. 그러니 너도나도 불법에 편승한다. 언젠가 도심 대로에 번쩍번쩍 광을 낸 검은 대형 승용차 한 대가 가뜩이나 복잡한 차선 하나를 점유한 채 정차하고 있었다. 체증을 참다 못한 운전자가 비켜달라고 요구하자 그는 차를 옮기는 대신 언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길게 줄지어 늘어선 차에 타고 있는 운전자들은 이 ‘자존심’ 강한 검은색 차 주인을 어쩌지 못하고 한참 동안 아까운 시간을 낭비해야 했다. 한국에서 운전할 때는 대단한 인내심을 요구받는다. 자신이 주위사람들에게 어떤 불편과 위험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해서 한국 운전자들은 대개 무심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건널목 교통사고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도로 위에서 죽거나 다치는 사람의 통계는 깜짝 놀랄만한 수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부적절한 장소에서 불필요하게 비극을 당하고 또 얼마나 많은 가정이 이로 인해 파탄을 겪어야 하는지, 나는 그 이유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쁜 줄 알면서 습관 못버려▼
내가 만난 한국인들은 이렇게 많은 교통사고에 놀라워하며 수치스럽게 느끼기까지 한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그런데도 나쁜 습관은 바뀌지 않고 있다. 모두가 그러니 나도 그런다는 사고방식이 한국인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교통 위반자를 더욱 엄하게 처벌하도록 교통관련법이 강화돼야 한다고들 말한다. 법이 강화되면 문제가 해결될까. 한국 교통문화의 현실이야말로 한국에서 계속되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미국에서 출생해 하버드대에서 교육학 석사, 뉴욕대에서 언어학 석사를 마치고 현재 이화여대에서 영어교육학을 강의하고 있다. 한국인 교수와 결혼해 1987년부터 서울에 살면서 ‘한국과 미국의 대조’(영문·한림원) 등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수잔 옥(이화여대 전임강사·영어교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