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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아이도루

입력 | 2001-03-09 18:56:00


◇사이버 인간은 또다른 인류인가

윌리엄 깁슨/ SF소설/478쪽 /1만원 /사이언스북스

어느 시대, 어느 분야에서든 기존의 패러다임을 뛰어넘어 새로운 지평을 여는 신화적인 존재가 있기 마련이다. 현대 SF문학사에서는 바로 윌리엄 깁슨이 그렇다. 그는 거의 20여년 전에 영화 ‘매트릭스’보다 더 화려한 아이디어와 심오한 철학을 담은 장편소설 ‘뉴로맨서’를 발표했고, 그 뒤로 이 작품은 사이버펑크의 성경이나 다름없이 간주되고 있다. 놀라운 점은 당시 깁슨은 컴맹이었다는 사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독자들은 좀 불운한 편이다. ‘뉴로맨서’는 우여곡절 끝에 90년대에 들어서야 겨우 번역판이 나왔고, 그나마 그의 후속작인 ‘카운트 제로’와 ‘모나리자 오버드라이브’는 출판사에서 저작권 계약까지 맺어놓고도 상업적 가능성을 비관해 출판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번에 출간된 깁슨의 ‘아이도루’가 각별히 더 반갑고 기대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제 ‘사이버스페이스를 넘나드는 활극’이라는 구성 자체는 좀 진부한 냄새가 날 법도 하다. 마치 사이버펑크라는 용어 자체가 그렇듯이. 하지만 깁슨은 ‘아이도루’에서 또 한 발자국 앞서나갔다. 이 작품의 기본 설정은 록 밴드의 가수와 사이버 가수의 결혼인데, 단순한 이벤트성 해프닝이 아니라 두 사람은 정말로 삶의 반려자가 되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사이버 가수는 스스로 진화해 꿈까지 꾸게 된 ‘인공지능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이 괴상한 결합의 진정성에 의혹을 품은 몇몇 사람들이 제각기 조사에 착수하고, 그 과정에 최첨단 나노테크놀러지 장비와 러시아 마피아가 연루된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인 레이니는 천재적인 데이터 분석가인데, 그가 사이버 가수와 직접 대면하는 장면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거대한 정보 덩어리’에 불과한 그녀가 네트워크 안에서 어떻게 진화해 온 것일까. 아마도 레이니는 ‘인간과 외계인의 조우’와는 또다른 성격의 인류사적 사건이라고 느꼈을 지도 모른다.

테크놀러지와 아이디어에 비중을 둔 듯이 보였던 전작들에 비해 ‘아이도루’는 ‘인간’ 또는 ‘생명’ 그 자체에 천착하고 있다. ‘뉴로맨서’의 주인공들처럼 비정하기 이를데 없는 하드보일드라기보다는 차라리 러브 로망에 가깝다. 어느덧 쉰을 넘은 작가의 연륜이 배었다고나 할까. 사실 적잖게 난해했던 ‘뉴로맨서’에 비하면 독자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가까이 다가선 셈이다.

20세기 이후의 과학기술 발전 속도가 얼마나 눈부신 지는 새삼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사이버 가수 ‘아이도루’(우상을 뜻하는 idol의 일본식 표기)와 같은 인공지능 생명체가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빨리 등장하지 않을까 궁금해진다.

다만 그것을 기대해야 하는 것인지 우려해야 하는 것인지는 판단을 유보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영화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에서 보여진 인공지능이란 한결같이 인간을 유해한 바이러스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박 상 준(SF컬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