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사람들은 따뜻했네
한 사람이 혼신을 다해 이뤄 놓은 예술 작품은 그것이 한 편의 시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소설이든 장르의 구분이 잘 되지 않는 법이다.
조은이라는 시인이 쓴 ‘벼랑에서 살다’(마음산책·2001)라는 에세이는 한 편의 장시 같기도 하고, 잉크를 펜으로 찍어 꼼꼼하게 새긴 한 편의 좋은 연작 소설 같기도 하다. 이 에세이는 또 삶의 구석구석을 착실하게 잡아 보여주는 한 편의 잔잔한 영화 같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사람을 꼼짝 못하게 잡아두는 이 산문의 매력은 아마, 저자의 진지하고 정직한 자기 성찰과 세상에 대한 뿌리칠 수 없는 따뜻한 애정에서 오는 듯하다.
학년말 방학이어서 시골의 작은 내 방에서 뒹굴뒹굴 구르다가 머리맡에 있는 산문집이 손에 잡혀 따뜻한 구둘장에 등을 대고 누워 아무 생각 없이 첫 장을 넘겼다.
한 장 한 장 책장이 넘어 갈수록 나도 몰래 책 속으로 쏙 빠져들기 시작했는데 ‘어, 어, 이거 장난이 아니네’ 나도 몰래 일어나 얼굴을 책 속에 박고는 뗄 줄을 몰랐다. 어머니께서 “용택아, 밥 묵어라”하시는 말을 몇 번 들은 것 같은데도 나는 계속 책을 읽고 있었다.
그가 사는 골목의 잡다한 이야기와 그가 혼자 사는 13.5평 집 이야기가 너무나 생생하고 선명하게 그려져 있어 나는 그의 골목에 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그는 사사로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들이 흔히 보는 그런 소모적이고, 읽고 나면 내 삶의 그 어느 한 구석도 위안이 안 되는 그런 글들이 아니다. 그는 글을 얼마나 조심스럽고도 꼼꼼하게 쓰고 다듬었던지 읽는 내가 온 몸에 힘을 줄 정도였다.
작고 가난한 골목에서 벌어지는 별 볼일 없는 것 같은 이야기에서 묻어나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하고 가차없는 애증은 참으로 삶을 엄숙하게까지 하는 것이다.
누더기 같이 가난한 골목, 두서넛이 눕기도 작은 집에서 혼자 사는 그의 삶은 정결하고 당당하고 눈물겹게 아름답다. 크고 거대하고 화려한 거짓들이 작고 따사로운 삶을 억누르고 허허한 삶을 강요하는 서울에서 좁고 가난한 그 어떤 골목에서 우리는 잊혀지고, 잃어버리고, 외면하고, 깔아뭉개버리는, 그러나 결코 버릴 수 없는 사람 사이의 인정을, 서로 살 부비며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보는 것이다.
책 곳곳에 실려 있는 그의 골목과 집안 살림 사진들은, 뒤집어진 우리들의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소유의 가치에 다시 눈뜨게 한다.(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