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가 저물어가던 99년 12월 세계 최대 증권사인 미국 메릴린치증권은 깜짝 놀랄 전략 하나를 발표한다.
이른바 통합선택(Intergrated Choice)으로 불리는 이 전략의 핵심은 고객이 당시 수수료의 절반인 거래당 29.95달러를 내고 인터넷을 통해 직접 주식을 사고 팔 수 있는 사이버트레이딩 상품을 내놓는 것.
99년초만 해도 메릴린치의 최고경영자(CEO)인 데이비드 코만스키가 “사이버트레이딩은 자본시장을 취약하게 만들 뿐”이라며 인터넷 주식거래의 위력을 부정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태도변화였다. 이는 온라인 증권거래의 강자인 미국의 찰스 스와프에서 비롯됐다. 메릴린치가 경쟁자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찰스 스와프가 사이버트레이딩 상품을 판매하면서 99년 중반들어 고객 약정고에서 메릴린치를 추월했던 것. 심지어 각종 미디어에서는 “메릴린치의 전통은 끝났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지금 메릴린치의 성적표는 어떨까. 메릴린치는 찰스 스와프를 제치고 다시 약정고에서 수위를 탈환했다. 그러나 메릴린치는 단순히 사이버트레이딩 상품을 도입했기 때문에 정상의 자리에 다시 올라서게 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메릴린치증권 개인자산관리 부문의 디렉터인 피터 햄은 “우리는 단지 인터넷으로 직접 사고 팔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 도구를 제공했을 뿐”이라며 “우리의 진정한 경쟁력은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리서치자료와 어떻게 투자해야 할지 상담해주는 능력에 있었다”고 말했다.
햄씨는 “단순히 저렴한 거래수수료의 장점만 갖고 있는 온라인 증권거래로는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고 내다봤다.
실제 온라인 증권사들은 출혈을 감수한 수수료 경쟁과 함께 최근 전세계적인 증시 침체로 주식거래 물량이 줄어들면서 존립까지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다. 급기야 온라인증권사는 최근 전통적인 오프라인 증권사의 장점인 투자자문 기능과 리서치 기능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실제 올해 들어 찰스 스와프의 광고카피가 ‘종합적인 자산관리를 자문해 드리겠습니다’로 바뀐 것도 이같은 변화의 흐름을 읽게 하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온라인 주식투자의 다음 단계는 정보통신 기술과 인간의 투자판단 기능을 결합시킨 ‘소프프웨어 로봇투자’로 옮아갈 것이라는 전망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시작 단계이지만 이미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컴퓨터가 알아서 투자해주는 ‘시스템 트레이딩(system trading)’이 정착되는 단계다.
시스템트레이딩은 과거의 주가변동 및 매매동향 등의 데이터를 계량적으로 분석한 뒤 사고 파는 조건을 미리 설정해 두면 투자자의 감정을 배제한 상태에서 컴퓨터가 기계적으로 사고 파는 기법. 이른바 금융기법의 첨단에 서 있는 ‘로봇투자’인 셈이다.
하지만 시스템트레이딩을 이용한다고 무조건 수익을 올리는 것은 아니다. 과거 데이터는 어차피 과거의 일이고 주가흐름의 방향이나 등락폭이 과거와 완전히 달라지면 시스템트레이딩 자체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교보증권 사이버마케팅부 한승정팀장은 “금융기법과 컴퓨터공학기술을 적절히 결합해 최고의 확률을 나타내는 시스템트레이딩 프로그램을 만드느냐를 놓고 경쟁을 벌이게 될 것”이라며 “결국 과거의 확률적 통계에 인간의 판단과 감(感)을 불어넣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
시스템트레이딩이 주식의 매수 매도시기를 판단하는 초보적인 단계라면 주식 종목 선택과 포트폴리오를 알아서 짜주는 ‘프로그래밍 트레이딩’은 좀더 선진화된 기법.
미국 텍사스대학의 오스틴전자상거래연구센터는 최근 ‘통합금융거래시스템(The Financial Bu―ndle Trading System)’을 개발했다. 이 시스템은 시장 가격정보가 담긴 서버에 자동적으로 수시 접속해 실시간으로 사고 팔 종목을 선정한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주문을 접수해 향후 오를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최저가로 팔려는 주식과 향후 하락 가능성이 높은데 상대방이 최고가로 사려는 주식 종목을 선별해낸다.
이어 단일종목이 아닌 5, 6개의 종목에 대해 매수주문과 매도주문을 동시에 내면서 투자위험을 줄이는 포트폴리오 투자를 가능하게 해 주는 시스템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경기변동과 금리 추이 및 거래량 등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설정해 상황에 따라 각자 다른 투자결정을 내리는 ‘플랜드 트레이딩(Planned Trading)’이 컴퓨터 주식투자의 새로운 트렌드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소프트웨어 로봇투자가 인간의 투자를 완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냐는 점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내젓는다.
교보증권 한팀장은 “컴퓨터의 결정에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큰 코다친다”며 “결국 투자자들이 결정을 내리는 데 보조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KAIST경영대학원 김동석교수는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컴퓨터가 인간의 판단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또 모든 투자프로그램이 거의 비슷한 로직으로 짜여져 유사한 투자결정을 내린다면 오히려 손실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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