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치사의 증거도 국가가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기밀입니까.”
‘우리나라 의문사 1호’인 고 최종길(崔鍾吉) 서울대법대 교수의 동생 최종선(崔鍾善·사진)씨가 12일 펴낸 저서 ‘산자여 말하라:나의 형 최종길교수는 이렇게 죽었다’(도서출판 공동선)는 전직 중앙정보부원이 직접 쓴 첫 수기라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은다.
김형욱(金炯旭) 전중앙정보부장이 김경재(金景梓·현 민주당 국회의원)씨에게 구술한 회고록이 있긴 하지만 전직 중앙정보부원이 재직중 관여했거나 보고들었던 공작의 구체적인 내용을 직접 쓰기는 처음. 최종선씨는 최교수가 중정에서 조사받다가 숨지던 73년 공교롭게도 현직 중정 감찰실직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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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12월 10대 총선을 앞두고 성남 지역에서 ‘대통령 특명’을 수행했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오세응 의원(8, 9대 신민당의원)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뽑더라도 거기 나가 한판 붙어보겠다’고 말해 ‘괘씸죄’로 걸렸던 것이다.… 당시는 한 지역구에 2명씩 뽑는 중선거구제여서 그를 떨어뜨리기 위해 신민당 유모 후보를 지원하는 우스운 나날을 보냈다.… 선거 하루 전인 11일 오후 당시 국내담당 차장이 3000만원인가가 든 누런 과일봉투를 가져왔다.… 성남 시장과 경찰서장을 불러 성남시청 회의실에 동장, 통장 등을 수십명 소집토록 해 봉투 안에 1만원권 한 장씩 넣어 돌리도록 했다.”
최종선씨는 “당시 이 지역구에는 중정 출신의 정동성씨가 공화당후보로 출마한 상태여서 그의 항의를 받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덧붙였다.
당시 중정의 ‘비열한 공작’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최씨는 보안정보국 경제과가 주도한 76년 동일방직 노조파괴 공작, 74년 민청학련 사건 당시 ‘서울대생 프락치’ 강모씨 연행조사, 72년 정일권 국회의장의 외도와 ‘유신헌법 찬반투표계획’ 누설에 대한 조사 등의 실상도 폭로했다.
“최교수가 숨진 뒤 81년까지 중정에서 숨죽이고 근무하는 등 정말 파란만장하게 살았다”고 자신을 소개한 최씨는 자신이 보고들은 ‘더러운 공작’들을 추가로 폭로할 수도 있다며 “국가정보원이 나를 비밀누설 또는 명예훼손 혐의로 잡아가도 좋다”고 강조했다.
실제 그는 최근 중정 시절의 동료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6월10일 중정 창설기념일에 이후락 장세동 등을 부를 게 아니라 ‘의인 김재규 부장’을 위한 묵념이라도 올리는 게 민주화 된 세상에 값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배포를 보이기도 했다.
최씨는 최교수가 숨지던 당시의 중정 내부상황도 상세히 밝혔다. 73년 당시 윤필용 사건(4월), 김대중 납치사건(8월) 등으로 퇴진 압력을 받고 있던 이후락 부장은 ‘사실상 부재’ 상태였고 검사출신의 차장이 역시 검사출신의 대공수사국장 등을 통해 중정을 끌고 나가던 상황이었다는 것.
그는 “당시 이 두 사람이 주도해 고 최교수를 ‘간첩’과 ‘자살’로 조작했고 현장조사를 맡았던 검사는 있지도 않은 ‘투신현장’을 조작해냈다”면서 “결국 이 사건은 출세욕이 강한 검사들의 합작품”이라고 규정했다.
이 같은 정황을 증거로 최씨는 자신이 감찰실장의 특명에 따라 이후락 부장이 재직중임에도 그와 동향인 울산출신 및 군 병참병과 출신의 특채자 100여명의 명단을 작성했으며 1주일 뒤 전원 직권면직됐던 비화를 공개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최씨는 고 최교수를 맡았던 주무수사관들과 관련, △차철권 수사관(3을급)은 국군보안사령부 준위 출신으로서 현재 서울 근교에 거주하며 △김상원 수사관(4갑급)은 연세대 출신으로 89년 공소시효 만료 뒤 미국으로 이민했다고 밝히며 “이들이 직접 진실을 밝히지 않을 경우 이들을 상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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