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유리창은 놀이터인가 봐요, 빗방울이 미끄럼을 타며 놀고 있잖아요"
화가 윤형재는 언젠가 딸이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비가 오던 날이었다. 딸에게는 유리창을 타고 떨어지는 빗방울이 꼭 놀이터에서 미끄럼을 타는 아이들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윤형재는 이런 순수함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윤형재는 영롱한 빛을 담은 둥근 원(圓), '점자'를 찾아냈다.
'아름다운 것들, 또하나의 세계'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미술전시회다. 딸의 눈에 비친 빗방울에서 영감을 받은 윤형재는 서점을 돌아다니며 점자를 배웠다. 윤형재는 캔버스 위에 흰색을 덧칠하고 그 위에 점자를 그려넣었다. 앞을 못 보는 사람도 그림을 만지며 감상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윤형재의 전시회에는 작품에 손 대지 말라는 주의가 없다. 누구든 그림을 만질 수 있고, 만져야만 제대로 볼 수 있다.
윤형재의 전시회를 보기(만지기) 위해 13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박영덕 화랑을 찾았을 때, 20여평의 아담한 전시실은 온통 흰색이었다. 만지는 그림의 느낌을 제대로 설명해주기 위해 시각장애인 장민섭씨가 함께 가주었다. 그림을 만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고, 그것은 시각장애인만이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흰색은 순수와 순결을 상징한다. 그러나 윤형재의 순수는 그 흰색을 손으로 더듬는 행위에서 시작된다. 장민섭씨가 화랑에 들어서자 윤형섭은 장씨의 손을 붙들고 그의 그림으로 안내했다.
이때부터 그림은 완성되는 듯했다. 장씨는 그림을 손으로 더듬어댔다. 장씨는 '사…랑'이라는 점자를 천천히 읽어냈다. 그리고 3색으로 채색된 둥근 원을 만져보더니 일일이 그 색을 물어보았다. 윤형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장씨를 안내하며 그림을 설명해주었다.
장씨가 미술전시회를 완벽하게 감상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친구들과 화랑을 찾을 때도 있었지만 아무도 그림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장씨는 눈이 멀쩡한 그들이 왜 그림을 보고 아무 느낌을 말하지 않는지 야속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장씨는 그나마 색을 구별할 수 있었던 시절의 감각을 떠올려가며 열심히 그림을 만졌다. 하지만 장씨가 선과 형태만으로 된 윤형섭의 추상화를 이해하기는 벅찬 듯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전시회라 구상적인 그림을 상상했어요. 하지만 추상화를 처음 보니까 기분이 좋네요. 말로만 듣던 피카소니 하는 화가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유년시절의 동화책을 끝으로 장씨는 그림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동화에서 추상화로… 너무 건너뛰었다는 생각에 안쓰러워지기도 했지만, 장씨가 "이 정도는 나도 그릴 수 있겠네요"라고 너스레를 떠는 바람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장씨는 감수성이 예민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에 제대로 자신을 표현해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고 한다. 이번 전시회로 장씨는 다시 한번 붓을 들어보게 되는 것일까?
"저에게 미술 전시회는 건물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다들 작품을 못 만지게만 하니까요. 이런 전시회를 보니 저도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어요."
이번 전시회는 15일까지 박영덕 화랑에서 계속된다. 윤형재는 홍익대학교, 프렛인스티튜트 등에서 공부했고 지금까지 24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미술평론가 유준상씨는 “이번 전시회에서 나타난 점자는 윤형재의 인간애의 발로”라고 평했다.
안병률/ 동아닷컴기자mokd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