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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한수산/즐기는 마라톤 자리잡았다

입력 | 2001-03-18 19:12:00


대회 시작 2시간 전인 오전 8시, 출발지 광화문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동아일보사 로비를 비롯해서 광화문 네거리의 구석구석에서 선수들이 몸을 푸느라 바른 파스 냄새가 솔솔 풍겨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달렸다.

마라톤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으며, 상대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유일한 스포츠이다. 이 단순성이 마라톤이 가지는 순결함이며 아름다움이다. 자기 자신과의 대결이라는 표현이 그래서 가능하다.

이 대회가 코스를 서울로 옮겼을 때 나는 ‘길을 회복하자’는 말을 이 지면에 썼었다. 오염 수치만이 아니다. 사람이 가지 않을 때 그 강은 죽은 강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거닐지 않는 거리, 사람이 달릴 수 없는 거리는 이미 죽은 거리인지도 모른다.

▼서울 거리에 생명이 넘쳐▼

참으로 오랫동안 서울은 사람이 거닐지 못하는 거리가 되어 왔다. 사람은 길에서 밀려나고 거리는 차들의 거리가 되었다. 그랬던 이 거리를, 이 길을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달렸다. 이 장관이 어찌 아름답지 않으며, 이 감격이 어찌 가슴 벅차지 않으랴. 동아마라톤이 그것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김이용에 대한 기대는 컸다. 그는 동계훈련이 끝날 무렵 2시간06분대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반 순조로운 달리기를 계속했던 그가 39km지점에서부터 얼굴을 찡그리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을 때는 한국선수 우승의 바람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1m58의 키에 48㎏의 몸무게, 남아공의 투과니는 애틀랜타올림픽 우승자로 이봉주를 3초차로 제쳐 우리에게 낯익은 이름이다. 그는 뒷머리를 손가락 굵기로 땋아 내리고 거기 구슬을 매단 귀여운(?) 헤어스타일로 경기에 임했다.

투과니의 코스 운영은 놀랍게 노련했다. 그는 레이스 초반 앞으로 치고 나가는 선두 그룹을 따라붙지도 않았고 2위 그룹에서 떨어지지도 않았다. 거의 전 경기를 2위 그룹의 후미에 머물면서 자신의 페이스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피니시라인, 잠실주경기장이 보이는 곳에서 선두로 치고 나왔다. 그 스퍼트의 기세는 대단했다. 역시 세계적인 선수, 노장다운 면모를 보여준 감동의 레이스 운영이었다.

다른 구기나 격투기가 상대방을 얼마나 아느냐가 중요한 관건이라면 마라톤은 자신을 얼마나 아느냐, 자신을 얼마나 컨트롤하는가 하는 개인 전략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2위를 한 투과니는 또한 여기에서 성공한 것이 아닐까.

임진수(코오롱), 유영진(서원대) ,이명승(한양대) 등 젊은 선수들의 분투도 눈에 띄었다. 이 젊은 선수들이 차세대 한국마라톤의 기둥으로 자라날 날을 기다려 본다.

한국 스포츠는 몇몇의 천부적인 선수와 가정을 희생하며 선수들을 기르는 지도자에 의해서 유지되어 온 점이 없지 않다. 마라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아마추어 선수가 뛸 수 있는 대회도 전국에 60여개로 늘어났다. 마라톤이 일반인이 즐기는 스포츠로 자리잡아 간다는 반가운 신호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점을 마스터스 대회 참가자들의 열의가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코스 곳곳에 내걸린 수많은 현수막에서도 잘 드러났다.

안산시 마라톤 클럽, 경주 포항 네티즌 마라톤 클럽, 의정부 달리마 클럽, 아마추어 무선사 마라톤 클럽, 양천 마라톤 클럽(백오리 사람들)…. ‘꽃길을 달리자’는 함평 나비마라톤대회를 알리는 그림을 등에 새긴 참가자들도 있었다. 이 마라톤 인구에는 특히 젊은 주부나 중년의 남자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선수-시민 함께 한 축제한마당▼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오늘 누구보다도 즐거워했던 사람들은 마스터스대회 참가자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보다도 더 즐거워한 사람들은 참가자들의 가족이었다.

젊은이들에게 민족혼의 기개와 의지를 불어넣자는 큰 뜻으로 시작된 동아마라톤이 오늘은 이처럼 수많은 동호인을 길러내고 있는 것이다. 즐기는 마라톤으로.

그러나 어찌 선수들만이랴. 오늘의 동아마라톤은 자원봉사자, 용인대 학생들, 경찰, 육상연맹, 교통 통제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연도에서 선수들을 뜨겁게 격려했던 서울 시민들이 함께 이루어낸 대회가 아닌가.

한수산(작가·세종대 교수)azaz9829@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