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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의 대중문화 째려보기]손짓과 눈빛의 연기자, 황수정님께

입력 | 2001-03-19 10:06:00


'태양은 가득히'가 마지막으로 인기몰이를 하였지만, 지난 주말 저는 '엄마야 누나야'를 보았습니다. 공수철(안재욱)과 장여경(황수정)의 사랑을 지켜보기 위해서지요. 행자(박선영)와의 삼각 관계가 극의 재미를 더해주지만, 저의 시선은 황수정님에게만 머뭅니다.

여배우의 연기를 이렇듯 주의 깊게 살핀 적이 언제였던가요. '거짓말'의 배종옥, '청춘의 덫'의 심은하 정도가 떠오르네요. "내가 그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아이는 알까?"라고 이성재와 이별하며 흐느끼는 배종옥, 딸을 잃고 빈 방을 빙빙 돌며 통곡한 후 이종원을 향해 "부셔버릴 꺼야!"로 복수를 다짐하는 심은하의 경지에 황수정님도 어느덧 올라선 듯합니다.

'허준'에서의 인기도 폭발적이었지요. 그러나 '허준'에서는 단정하고 차분한 면모만 돋보일 뿐 복잡미묘한 내면을 드러내는 연기를 보여주지는 못했지요. '엄마야 누나야'의 장여경을 훌륭하게 소화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인간의 내면에 천착해야 합니다. 공수철에게 호감을 가지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 또 그에게 상처받는 순간들, 그 상처를 넘어서는 나날을 침묵 속에서 섬세하게 연기해야 하니까요.

손도 손이지만 감정을 주고받는 것은 역시 눈이겠지요. 침묵 속에서 눈으로 말하기. 물론 드라마에서는 황수정님의 고운 목소리가 수화를 따라서 흘러나오긴 하지만, 정작 연기를 할 때는 그런 부분까지 다 계산에 넣고 눈을 감거나 바라보거나 웃거나 눈물 흘려야 하니까,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겁니다.

언젠가 언어장애가 있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연애소설을 썼던 적이 있지요. 헌데 그녀가 수화를 통해 타인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누는 것을 표현하기가 힘들어 미완성인 채로 접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손짓을 언어로 옮기는 어려움이 아니라 그 손짓 자체에 감정과 사상을 함께 넣어야 하는 어려움이지요. 때로는 빠르고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한없이 무겁고 때로는 새처럼 가볍게. 황수정님의 수화도 이제 암기를 넘어서 자기 표현을 향해 나아가는 듯합니다.

토요일(3월 17일). 공수철과 행자를 모두 불러내서 둘 사이의 관계를 따져 물을 때는 놀람과 분노를 억누르며 차근차근 사실을 확인하려는 의지가 눈에 어립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동거녀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단정함을 잃지 않는, 그러면서도 모든 사실이 드러나자마자 놀라고 슬프고 억울한 심경을 황수정님의 눈은 놀랄 만큼 꽉 차게 드러내시더군요.

그리고 일요일(3월 18일). 이번에는 공수철의 정체를 알고도 그를 포기하지 않고 진심을 이끌어내며 사랑을 확인하는 눈빛을 선보입니다. 토요일의 눈물이 상처의 눈물이라면 일요일의 눈물은 사랑을 잃을 수 없다는 의지의 눈물이겠지요. 그 두 눈물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황수정님은 침묵으로 보여줍니다. 천 마디 만 마디 말보다 사랑의 느낌이 한꺼번에 시청자의 몸으로 확 들어오는 듯합니다.

아니 에르노라는 프랑스의 여류소설가는 꼭 해야 하는 중요한 말을 아름답게 뱉는 것보다 차라리 침묵의 영역으로 숨겨버리는 쪽을 택하지요. 침묵이 이런 폭발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얼마나 팽팽한 긴장이 앞뒤에 배치되어야 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조금만 타이밍을 놓쳐도 어색해지고 또 조금만 손짓이나 몸짓이 서툴러도 연기라는 것이 곧 들통나고 말 테니까요.

황수정님은 이제 시작이겠지요. 어머니 나정옥(고두심)에게 공수철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장여경의 사랑은 그리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네요. 행자의 방해와 공수철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그녀를 궁지로 내몰 겁니다. 이 모든 어려움을 과연 장여경이 어떻게 극복해나갈지 궁금합니다. 물론 그 과정은 오로지 황수정님의 손짓과 눈빛을 통해서만 표현되고 이해되겠지요.

숨이 턱 막혀 장여경의 침묵을 나의 침묵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순간이 주말마다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침묵을 느리게 채워나가는 법을 터득하셨으니, 황수정님은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다음 토요일이 기다려집니다.

소설가 김탁환(건양대 교수) tagtag@kytis.ko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