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의 역사는 금융시장의 거품과 관련된 일화들을 남기며 전개된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특히 극적인 사건들이 많았는데 18세기 영국의 사우스 씨 버블 (남해회사 거품)은 그 중 현란한 예에 속한다.
▼신축전 통화정책 필요▼
사우스 시 회사의 투기성 사업계획 발표와 함께 한 몫을 노리는 자금이 폭발적으로 흘러들었고 투자열기의 확산은 기타 수많은 회사의 창업으로 연결되는 일이 벌어졌다. 중앙은행론의 창시자인 월터 베지핫의 기록에 의하면 이 때 압권은 무슨 일을 할 지는 나중에 알려질 회사 의 창업에까지 돈이 몰린 대목이었다고 한다.
이런 극단적인 '묻지마 투자' 는 아니라 해도 혁신에 의한 모험적 이익기회의 출현이 사후적으로 조정돼야 하는 투자거품을 수반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경제원리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애초에 옥석이 분간될 수 있었다면 혁신도 모험도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고점에서 절반 이하로 하락한 나스닥의 최근 동향은 이 원리의 확인에 불과하며 그래서 놀라울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다.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금융시장의 조정 과정이 경착륙돼 골이 깊은 불황을 야기할 위험이 조절될 수 있는지의 여부다. 1987년 블랙 먼데이를 간단히 요리함으로써 월가의 황제로 등극한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명성에 걸맞는 성과를 다시 한번 보여줄 것인지가 관심인 것이다.
크게 보아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14년 전에 비하면 위험요인이 있다는 느낌이다. 주가와 같은 자산가격이 급락할 때 가장 우려되는 것은 그로 인해서 파산에 이를 경제주체가 얼마나 되는가에 있다. 예컨대 은행과 같은 금융기관이 위험에 처한다면 일본의 예에서 보듯이 사태는 장기화할 확률이 높다. 다행스럽게도 현재 미국의 경제주체 중 심각한 취약성을 보이는 부문은 없는 것 같다. 은행부문은 부실자산 비율이 80년대의 절반 수준으로 유례없는 건전성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감세 추진이 정부재정의 건실함을 배경으로 한 것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호황기에 기업 부문의 부채가 증가했다지만 국민소득 대비 비중으로 보면 80년대 후반의 수준에 못미치거나 비슷한 정도인 것으로 읽힌다.
그래서 기업의 대량부실화나 은행위기와 같은 시스템의 문제가 야기될 가능성은 낮다는 종합의견이 얻어지지만, 위험요인은 소비자다. 국민소득 대비 미국 가계의 부채는 80년대 중반부터 상승추세가 이어져 왔다. 쌓아놓은 부채는 엄연한데 주가폭락으로 재산이 줄게 되면 이른 바 소비심리가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 10년 호황이었으니 경기침체가 당연하다는 일부의 참회(?)도 심리위축에 일조할 요인이고, 이렇게 되면 미국 경기가 금년 내에 상승세로 반전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악성침체로 전화될 이유는 없으나 미국의 경기냉각이 최소한 금년 중에는 지속될 위험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정당할 것 같다.
우리 경제의 기준에서 이 판단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일본경기가 이미 나락에서 헤매고 있는 상태이므로 수출환경 악화로 국내 통화정책이 다시 한번 신축적으로 대응해야 할 상황이 전개될 수 있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위기에서 기회를 찾아내겠다는 자세를 갖추는 일이다.
▼구조조정 잘하면 새 자금 밀물▼
나스닥의 폭락은 일단 세계 주식시장의 동조 하락을 유발하고는 있다. 그러나 모든 나라에서 자본이 유출될 수는 없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자본이 유입되는 경제가 있기 마련이다. 금년 들어 미국 정크본드 시장이 활성화된다는 소식은 그 동안 정보통신(IT)산업만을 외골수로 지원하던 자본이 새로운 투자처를 찾고 있다는 단편적 증거다. 이와 관련해 특기할 사항은 세계금융의 새로운 현상 중 하나가 벌처펀드와 같은 고위험 투자수단에 식성을 가진 투자펀드의 증가라는 점이다. 즉 미국 주식시장의 침체를 계기로 자본이 이들 펀드로 유입되고 이들에 의해 국제자본이동이 활성화하는 현상이 새로운 트렌드로 등장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것은 우리 경제의 구조조정에 나스닥의 폭락이 새옹지마(塞翁之馬)가 될 수 있는 기회다. 그리고 구조조정 진전에 대한 신뢰를 유지함으로써 이 기회가 과연 도래할 때 이를 놓치지 않는 일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신인석(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