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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훈의 섬과 사람들] 전남 여수시 거문도

입력 | 2001-03-23 11:29:00


◇ 타는 그리움, 동백꽃 잔치로 초대

이맘때쯤의 거문도는 곱디고운 동백섬이다. 봄빛 무르익은 3월이면 남해바다의 섬들은 죄다 동백섬으로 탈바꿈하게 마련이지만, 숲의 규모와 꽃빛깔의 화사함에서 거문도를 능가하는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거문도에서는 어딜 가나 잘 자란 동백나무가 지천일 뿐만 아니라 무성한 잎새를 비집고 피어난 동백꽃도 유난히 싱그럽고 새뜻하다. 염려(艶麗)한 선홍빛의 꽃잎과 선명한 노란색의 꽃술을 품은 동백꽃마다 섬뜩한 요기(妖氣)마저 느껴질 정도다.

참으로 멀고 아득한, 그래서 찾아가기도 수월치 않은 거문도를 이 즈음의 섬 여행지로 선택한 것도 실은 섬뜩하리만치 아리따운 동백꽃을 보기 위해서였다. 특히 거문도등대 초입의 동백숲은 여태껏 가본 곳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다. 서도의 수월산(196m) 남쪽 끄트머리에 자리잡은 거문도등대는 1905년 4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불을 밝힌 등대인데, 차가 다니는 길이 끝나는 지점부터 등대에 이르는 1.6km 가량의 산책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울창한 동백꽃길이다.

양쪽 길가와 머리 위쪽에는 앞다투어 피어난 동백꽃이 온통 핏빛이고, 길바닥엔 통째로 낙화(洛花)한 동백꽃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나뒹군다. 사방팔방이 온통 동백꽃이라 꽃멀미가 날 지경이다. 이따금씩 산허리를 가쁘게 돌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아득한 벼랑 위에 올라서기도 하는 숲길의 율동감도 아주 경쾌하다. 뿐만 아니라 성긴 숲 사이로 간간이 드러나는 쪽빛바다의 풍광도 상쾌하기 이를 데 없다.

행정구역상으로 전남 여수시 삼산면에 속하는 거문도는 사실 하나의 섬이 아니라 동도(東島) 서도(西島) 고도(古島) 등의 세 섬을 아우르는 지명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오랫동안 ‘삼도’(三島)라 불리기도 했다. 또한 고도와 서도는 삼호교라는 연도교(連島橋)로 연결돼 있고, 남북으로 길게 뻗은 동도와 서도의 한중간쯤에 위치한 고도는 거문도를 비롯해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삼산면의 행정중심지 구실을 한다.

고도는 거문도의 세 섬 중에서 면적이 가장 작다. 그런데도 동서 양쪽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동도와 서도가 거센 파도와 바람을 막아주는 바다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어 이미 조선시대 말에 제법 큰 규모의 항구가 들어섰다. 그 유명한 거문도사건의 주역인 영국군이 대규모 요새와 군항을 구축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곳은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여객선터미널 수협 등의 공공기관과 여관 식당 슈퍼 유흥주점 등이 몰려 있어 원도(遠島)의 항구답지 않게 번잡하다. 그래도 밤 9시만 되면 거리엔 인적이 뚝 끊기고, 적막한 포구에는 촘촘히 늘어선 고깃배들만이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 밤새도록 흐느적거린다. 거문도에서 하룻밤을 묵는다면 이토록 한가로운 포구의 밤 풍경도 한 번 들여다볼 일이다.

◇ 1905년 불밝힌 우리나라 최초 등대 여전… 거문도 사건 아픔도

거문도에서는 어딘가를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고도를 제외한 두 섬은 걸어다닐 수 있을 만큼 작지도 않을 뿐더러 대중교통편 또한 마땅치 않은 탓이다. 고도와 서도 전역을 운행하는 승합차형 택시가 있지만 기본요금(3100원)이 워낙 비싸서 주머니사정이 넉넉지 않은 사람은 선뜻 이용하기가 어렵다. 그나마 택시도 두 대뿐이어서 고도 이외의 지역에서 전화로 불러올 경우에는 추가로 콜(call) 요금을 내야 한다. 또한 거문항에서 동도로 이동하려면 작은 연락선을 타야 하는데, 부정기적으로 운항하기 때문에 시간을 맞추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더군다나 동도에는 택시조차 없어서 천상 다리품을 팔며 돌아다닐 수밖에 없다.

그래도 거문도, 특히 고도에서의 사나흘 여정은 꿈결처럼 흘러간다. 어느 바닷가에서나 간단한 채비의 낚싯대만 드리우면 학꽁치 볼락 등의 입질이 끊이질 않는다. 게다가 섬의 면적이 작아서 어디라도 부담없이 걸어다닐 수 있고, 포구를 조금만 벗어나면 동백나무 늘어선 오솔길로 접어든다. 야트막한 언덕에 올라서면 고도 주변의 푸른 바다와 정겨운 갯마을들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느긋한 걸음으로 소요(逍遙)하면서 여심(旅心)을 돋우기엔 아주 제격이다. 특히 거문초등학교에서 영국군 묘지로 이어지는 비탈길의 주변에는 제철을 만난 동백꽃 유채꽃 수선화가 만발하고, 호수 같은 바다 저편에는 짙푸른 상록수림에 뒤덮인 수월산의 오롯한 자태가 시야에 들어온다.

고도의 거문항에서 동쪽으로 칠십 리쯤 떨어진 바다에는 거문도의 대표적인 절경으로 꼽히는 백도가 있다. 망망한 쪽빛바다 위에 점점이 뿌려진 36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백도는 무인도인 덕택에 지금도 원시적인 자연미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백도는 다시 상백도와 하백도로 나뉘는데, 끝 모를 심연(深淵) 위로 솟구쳐 오른 바위섬들마다 매바위 병풍바위 각시바위 석불바위 서방바위 곰바위 등 다양하고도 독특한 형상의 기암괴석이 즐비하다. 또한 규모가 큰 바위섬의 위쪽에는 갖가지의 늘푸른 초목들이 자라고 있어 한겨울에도 변함없이 싱그러운 초록빛을 띤다.

봄기운 가득한 해풍(海風)과 다사로운 햇살 아래 이처럼 빼어난 백도의 비경을 둘러보거나, 거문도 등대 주변의 동백꽃터널을 유유자적하게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3월의 거문도 여행에서는 더 바랄 게 없다.

< 양영훈 · 여행칼럼니스트 travelmaker@hanmail.net >

◇ Tips

거문도사건

1885년(고종 22) 4월15일부터 1887년 2월27일까지 영국군이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한 사건이다. 조선 말기에 민씨 정권이 러시아의 힘을 빌려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하고 왕실을 보호하려 한다는 밀약설이 분분하자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거문도에 상륙했다. 당시 거문도는 조선과 일본간의 해상통로이자 러시아 동양함대의 항로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군은 정세에 따라 200∼800명의 병력과 5∼10척의 군함을 주둔시켰을 뿐만 아니라 포대와 병영을 섬 곳곳에 구축하였다. 영국군과 거문도 주민들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했는데, 주민들은 영국군에게 노동력과 토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보수와 의료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군은 청, 러시아, 일본 등의 열강과 조선 정부가 거세게 반발하자 러시아로부터 ‘한반도의 어느 곳도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숙식 거문도의 숙식시설은 대부분 면사무소와 여객선터미널이 있는 고도에 몰려 있다. 거문장(666-8052) 백도장(666-8150) 뉴백도장(666-1874) 삼호장(665-7457) 등의 여관과 하얀집(666-8053) 오영일(665-6372) 김한길(666-8133)씨 댁 등의 민박집이 모두 고도의 거문항 주변에 자리해 있다. 거문항과 마주보는 서도의 덕촌리에도 김민혜(654-6171) 나웅진(654-6171) 박금수(654-6171) 김영선(654-6171)씨 댁 등의 민박집이 있으나 동도에는 전문 민박집이 매우 드물다. 숙박료(2인 기본)는 여관 2만5000원, 민박 2만원 선이다. 하지만 낚시 손님을 주로 상대하는 민박집에서는 1인당 하루 2만원에 두 끼니(조석)의 식사를 차려주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다 낚싯배와 점심 식사를 제공받으려면 2만원을 더 내면 된다. 거문항 근처에는 산호횟집(665-5802) 백도횟집(665-8017) 매일횟집(666-8478) 여성호횟집(665-6372) 등의 횟집이 밀집해 있는데, 싱싱한 생선회뿐만 아니라 매운탕 김치찌개 백반 갈치구이정식 등의 메뉴를 맛볼 수 있다. 음식값과 메뉴는 대체로 엇비슷한 수준이며, 음식 맛도 대체로 만족스러운 편이다.

교통·서울→여수: 강남고속터미널에서 6:00∼17:50까지 40분 간격으로 고속버스 운행. 약 5시간 50분이 걸리며, 심야버스도 하루 1회씩(22:40) 운행한다. 서울역(02-391-7788)에서도 전라선 종착역인 여수역(662-7788)까지 운행하는 열차가 6:35∼23:50까지 1시간 간격으로 출발한다. 금-토-일요일과 공휴일 전날에는 무궁화호 1회(23:20), 토요일에는 새마을호(15:35)가 1회씩 증편된다. 여수까지의 소요시간은 약 5시간30분(새마을호)∼6시간(무궁화호) ·여수↔거문도: ㈜온바다(663-2191)의 데모크라시3호가 하루 2회(여수발-8:00 14:00, 거문도발-10:30 16:30), 청해진해운 (663-2824)의 순풍호가 하루 1회(거문도발-8:00, 여수발-14:30) 왕복 운항한다. 소요시간은 1시간30분(데모크라시3호 직항)∼2시간 50분(순풍호)이며, 뱃삯(성인 편도)은 2만4550원(데모크라시3호 1등실), 2만3450원(순풍호)이다. ·거문도↔백도: 거문항(666-8215)에서 ㈜온바다의 백도구경호가 부정기적으로 운항한다. 바다 날씨만 좋으면 비수기에도 하루 한번쯤은 운항하지만, 딱히 정해진 시간이 없으므로 전화로 미리 출항시간을 알아보는 게 좋다. 운항 소요시간은 약 2시간30분이며, 요금은 1만3000원이다. ·거문도 내의 교통편: 고도와 서도의 여러 마을과 관광지를 오가려면 거문도택시(017-661-1681) 소속의 승합택시(기본요금 3100원)를 이용하거나 걸어다녀야 한다. 그리고 거문항과 동-서도의 어촌마을 사이에는 주로 여객선의 입-출항 시간에 맞춰 운항하는 덕성호 거문호 등의 도선을 이용한다.

※ 지역번호 : 0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