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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뉴스]재임용 탈락 교수의 무학점 강좌

입력 | 2001-03-23 19:21:00

강의중인 김민수 교수(사진 유뉴스 제공)


서울대 디자인과 김민수 교수가 재임용에서 탈락된 후 99년 2학기부터 3년째 무학점 릴레이 연대강좌를 하고 있는 서울대를 지난 20일 찾았다.

▼원로교수 친일행적 지적으로 십자가를 지다▼

김 교수는 지난 98년 한 원로교수의 친일행적을 지적한 논문을 발표한 뒤 교수자리를 내놓아야 했던 소위 김민수 교수사건의 주인공.

이 사건은 한국대학들의 속내에 감춰진 천박한 권위주의가 양지로 들춰진 계기가 된 반면 김교수 개인에게는 패거리 학풍에서 왕따로 살아가는 고단한 십자가 길의 시작이기도 했다.

관악산을 품고 있는 2001년 서울대의 봄은 교정 여기저기서 막걸리를 놓고 대화를 주고 받거나, 동아리 신입생들의 신고소리들로 생기가 넘쳤다.

강의가 있는 인문대 7동은 인문대 건물들 중에서도 구석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수업시작 5분이 지난 강의실 앞은 들어가지 못한 학생들이 김교수가 보이는 문밖 가까이에 자리를 잡느라고 조금 소란스러웠지만 김교수는 벌써 수업에 열중해 있었다.

수업 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문밖에서 분주히 왔다갔다하는 학생들이 눈에 띄어 알아보니 무학점 강의를 기획하고 준비한 '김민수 교수 복직을 위한 학생대책위'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4년이나 지난 교수의 복직에 아직도 매달려 있는 사연이 궁금해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준비된 강의실이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학생이 몰려들어 문밖에서까지 수업을 듣고 있다(사진 엄성식 유뉴스기자)

▼대학사회에 고함▼

"다른 행사 이름으로 강의실을 빌려 김민수 교수님이 강의하시는 것이 발각돼 싸운 적도 많아요"라는 박채연씨는 역사교육학과 97학번이다.

그는 "99년 6월초 제가 소속되어 있는 총연극회에서 김민수 교수사건과 관련된 '대학사회에 고함'이란 연극을 무대에 올린 것이 대책위에 뛰어든 계기가 되었어요. 공연의 영향이 컸는지 김민수 교수 수업에 학생들의 참여도가 높아지기도 했구요"라며 참여 계기를 밝혔다.

영문과 대학원생인 조충환씨는 김민수 교수사건을 접하고 자신의 특기인 영상물로 이 일을 알려내고자 결합하게 된 경우다.

"대학원을 결심하고 나서 우리나라의 대학현실에 대해 더욱 깊이 고민하게 되었어요. 대학원사회는 기득권을 가진 교수의 생각이 90%를 차지해요. 모든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지고 있단 얘기죠. 나도 언젠가 '김민수 교수'처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배제할 수 없었어요. 지금이 중요한 시기라고 봐요"

조씨는 "대학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김민수 교수사건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김민수 교수와 관련된 다큐멘터리 2개를 만들어 새내기 학교(오리엔테이션)때 틀었는데 호응이 좋았다는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대학개혁은 교수개혁으로부터 출발▼

대책위 중에 가장 어려보이는 홍범천씨는 지질학과에 다니는데 대학을 개혁하려면 교수사회를 개혁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힘이 실린 어조로 말했다.

홍씨는 "대학원가서 제자가 논문을 썼을 때 교수 자신의 논리와 상반되면 통과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김민수 교수의 복직은 교수개혁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을 겁니다. 이것을 이기면 다 이길 수 있다는 확신으로 참여하고 있어요"라고 주장했다.

▼이름을 밝힐수 없는 이유▼

이름을 밝힐 수 없다는 한 미대생은 "내가 이름을 밝혔을 때 미대교수들이 왜곡된 언론플레이를 할 수 있단 말이죠. 내가 김교수의 사주를 받아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에요"라고 말했다.

이 학생은 "지금 미대 학생들 사이에서는 '김민수' 얘기만 나오면 뒷걸음질치는 상황이에요. 여담이지만 술자리에서 모 교수가 한마디하면 찍힌 학생은 바로 불이익을 당해요.…하지만 김교수 사건에 대한 자세한 사실을 알고나서 피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알았어요"라고 말했다.

대책위의 학생들 중에서는 사건의 발단이 된 친일파 원로교수 장발동상에 일장기를 붙혀 학생들의 시각을 자극하는 일로 이 문제를 극대화시키려고 했다고 전했다.

학생대책위에서 만든 김민석 교수의 강좌 포스터(사진 학생대책위)

▼사람은 누구나 죽는데 소신껏 살다 죽으련다▼

대책위와 얘기를 끝내고 강의실로 가서 문틈으로 고개만 삐죽히 들여놓고 있는 학생들 틈에 섞였다.

'디자인과 생활'이란 제목의 수업이 중반을 지나는 시간이었다. 디자인 캐릭터가 담긴 액정 화면을 보면서 거침없이 이어가는 김교수의 강의에 매료돼 넋을 잃고 있는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의 디자인은 현대 미국식 대량생산 체제를 그대로 흉내내고 있어요. 전통적인 것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해도 무관하지요. 디자인은 개인 삶을 뛰어넘어 국가적 이미지 차원에서 봐야해요. 미국의 코카콜라나 맥도널드의 디자인이 세계적으로 성공한 것은 그것이 내수시장에서 아주 오래 전에 성공했기 때문이란 것이죠.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장점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아요. 서양의 눈에서 본 우리 것에만 집착하는 것이죠"

김교수가 AD79년 전에 화산폭발로 돌덩이가 된 사람들이 여러 모양새로 어우러져 있는 '폼페이'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난 이곳에서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금기시 하지 않기로 했어. 사람은 어차피 죽어. 그게 사람이야. 그래서 구질구질하게 살지 말고 소신껏 살자는 내 신념에 더욱 힘을 줬어. 내가 이렇게 배 째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거야"

김교수가 능청스럽게 얘기하자 학생들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간혹 웃다 말고 눈초리가 심각해지는 학생도 있었다.

2시간동안 한번도 쉬지 않고 강의를 이어나가는데 학생들의 집중력은 한번도 흐뜨러지지 않았다.

디자인 하나를 놓고 역사와 정치와 인간사를 연결시켜 설득력있게 진행된 수업이었다.

한양대에서 왔다는 한 학생은 "우연히 오게 됐다. 수업에 대한 기대보다는 사실 김민수 교수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왔는데, 수업이 너무 재밌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다음 수업에도 참여하고 싶다"며 수업을 높이 평가했다.

수업중간에 나간 전신영(불어교육과·00학번)씨는 "이런 수업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몰랐다. 친구에게서 듣고 참여했는데 강의가 재밌다. 다른 수업이 있어 중간에 빠져나와 아쉽다. 앞으로도 이런 수업정보 있으면 많이 알려줬음 좋겠다"라고 했다.

수업이 끝난 뒤 수업도구를 챙기고 있는 김교수에게 학기 첫수업에 대한 강의소감을 물었다.

"학생들이 많이 와줘서 너무 고맙죠. 뭐"라는 한마디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강의를 할 때의 여유 만만한 그의 모습과 비교해 봤을 때, 경계가 묻어나는 긴장감이 느껴진 건 나의 와전된 느낌일는지도 모르겠다.

비약일지는 모르겠지만 기자가 그 자리에서 느낀 바로는, 그는 공부를 하고 학생들과 평등하게 지식을 나누고, 그 학문이 사회에 환원되기를 바라는 학자의 모습을 제외하고 인간관계의 처세술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진실과 마주했을 때 에둘러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는 사람 말이다.

다만 현실대학에서 기득권을 가진 주류가 학문의 발전과 무관하게 '줄을 요령 있게 잘 타내는 무당(?)'만을 선호한다면 우리 모두가 내부고발자가 되는 길 밖에 없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한편 김교수는 작년 1월 18일 서울대 총장을 상대로 낸 '교수재임용 거부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판결을 받았으나 그해 8월 31일 항소심에서 패소판결을 받은 상태다

유뉴스 제공(http://u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