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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108가지 일화담은 '광덕스님 시봉일기'

입력 | 2001-03-26 18:50:00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이 오면 산 아래에서 절까지 올라오는 계단의 눈을 치우는 것이 큰 일이었다. 그날도 오후부터 눈이 내렸다. 저녁 9시쯤 눈을 쓸었는데 밤 11시쯤 나가보니 또 그만큼 쌓여 있었다. 잠을 자지 않고 눈길을 쓸고 또 쓸었다. 꼬박 밤을 밝혀 눈길을 틔우고 새벽 예불을 올리는데 스님이 그 길을 따라 왔다. 미끄러지지도 않고 신발에 눈을 묻히지도 않고 스님은 편안하게 법당에 이르렀다. 나는 그것으로 감사했다. 예불을 마치고 스님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얼른 허리를 숙여 아침 문안을 올렸다.세월이 지나 생각해보니 그처럼 무조건 고개 숙이고 따를 수 있는 스님이 내게 있었다는 것 자체가 그대로 행복이고 법열이었다.”

경기 안성 도피안사(到彼岸寺) 주지 송암(松菴·48) 스님이 1999년 입적한 스승 광덕(光德) 큰스님과의 사이에 실제 있었던 108 가지 일화를 통해 지극한 불교의 사제(師弟)관계를 보여주는 책 ‘광덕스님 시봉일기 1, 2’를 펴냈다.

나이 들어 늙고 병들어도 세속에 의지할 곳이 없는 출가한 승려의 세계에서 스승과 상좌의 관계는 세간의 사제관계를 넘어 부자관계 부부관계를 합한 만큼이나 큰 의미를 지닌다.

송암 스님은 부산 범어사 행자 생활 때부터 한 스승을 따라 대각사 보현사 불광사 등 여러 절을 다니면서 보고 느낀 감명깊은 교훈을 단상(斷想)의 형식으로 이 책 속에 담았다.

어느 봄날 스승이 산책을 하다가 진달래 우거진 꽃밭을 보고 제자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이면 늦는다”며 꽃구경을 하라고 채근해 부르던 일, 스승이 절을 비운 사이 공양주 할머니 박수 반주에 맞춰 조용한 절에서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다가 밤길로 돌아온 스승에게 들킨 일, 스승에게 준엄한 꾸지람을 듣고 땅에 이마를 대고 납작 엎드려서 사흘 밤낮을 빌고 또 빌던 일 등 읽는 이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져가는 훈훈한 일화들로 가득차 있다.

송암 스님은 “큰 스님이 세상에 계실 때 미처 알지 못했던 가르침을 지금에야 가슴 사무치게 깨닫는 일이 많다”며 “왜 살아계실 때 좀 더 열심히 배우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