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어느 날, ‘삐삐삑’하는 날카로운 전자 자명종 소리가 예술가 구보 씨를 깨웠다. 해외 전시회에 출품할 작품을 준비하느라 새벽녘에야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침 일찍 병원에 들러야 한다. 구보 씨는 고소공포증을 심하게 앓아 왔다. 그간 수 차례 해외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기는 했지만 해외 나들이는 꿈도 못 꿨었다.
구보 씨의 치료를 담당하는 곳은 신경정신과 가상현실팀. 담당 의사와 인사를 나눈 후, 머리에 오토바이 헬멧 같은 모자를 쓰고 특수복과 3차원 특수안경을 착용했다. 의사가 가상현실 기계의 시작 단추를 누르자 구보 씨의 눈앞에는 번지점프 장이 나타났다.
오늘의 목표는 일반 건물 15층 높이에서의 점프. 지난달에 10층 높이에서의 가상현실 번지점프에 성공한 바 있어 그리 두렵지 않았다. 숨을 고른 후, 아래로 뛰어 내렸다. 온 몸이 출렁거리기를 수 차례, 마침내 몸이 균형을 잡았고 눈 아래로는 강물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성공이었다.
오늘로서 치료는 한 고비를 넘겼다. 담당 의사는 축하한다며 다음 번에는 남산 타워를 케이블카로 올라보자고 한다. 알프스산 스키 활강, 한라산 스카이다이빙, 그랜드 캐년 헬기 투어 등의 치료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다. 물론, 모두 가상현실을 통해서이다. 이들 프로그램들을 성공리에 마치게 되면 항공편 해외여행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병원에서 나와 작업실로 갔다. 요즈음은 미술에서도 가상현실 작품이 주류이다. 구보 씨의 해외 전시 출품작 또한 오감을 통해 금강산을 체험하는데 맞춰져 있다. 시각 디자인은 마무리가 되었고, 지금은 금강산 운무의 촉감을 디지탈화해 작품 속에 담는데 전력하고 있다.
특수복을 입고 작품 속에 들어갔다. 눈 앞에 비로봉의 정상이 다가서고 그 아래로 장엄한 운무가 바다에서 밀려든다. 운무의 형상과 색감은 뛰어나지만, 구보 씨의 볼을 스치는 운무의 촉감은 아직 맹송맹송하다. 해수의 소금기가 배어있는 촉감을 주기 위해서는 보완이 필요하다. 작품 속 운무의 촉감이 가상적이기는 하나 현실적이지는 못한 것이다. 성공적인 가상현실이란 완벽히 가상적이면서도 완벽히 현실적이어야 한다.
밤 늦게서야 작업실을 나섰다. 그래도 오늘은 고소공포증 치료에 성과가 있어 뿌듯하다. 힘들여 분양 받은 아파트가 10층이어서 저층의 전셋집을 구하러 다녔을 때의 민망함, 경품으로 받은 제주도행 왕복항공권을 겸연쩍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때의 섭섭함 등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일은 번듯한 스카이 라운지에서 아내와 함께 저녁이라도 해야겠다.
초인종을 눌렀다. 아내가 문을 열어줬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십 수 년 동안 보아온 아내의 얼굴이 돌연히 낯설게 느껴졌다. 가상적 이미지로서의 가짜 아내인지, 현실적 실체로서 진짜 아내인지가 혼동되었다. 고개를 가로 저으며, 구보 씨는 아내의 얼굴을 덥석 움켜쥐었다.
김진엽(홍익대 예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