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파 3사에서 유일한 어린이 동요프로그램인 ‘열려라! 동요세상’(KBS)이 봄 개편과 함께 폐지되거나 월 1회로 축소 편성될 것으로 알려졌다. 시청률 법칙 앞에서 힘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공영성’의 허약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는 일이다.
이 프로의 평균 시청률은 5% 정도. 그러나 방송사측은 프로그램 폐지가 꼭 시청률 때문은 아니라고 말한다. 프로에 콘테스트 형식이 도입되면서 아이들 노래지도 학원이 판을 치고, 치맛바람과 과열경쟁 문화가 확산될 우려가 있다는 것. 잘 알려지지도 않은 이런 ‘역기능’ 때문에 닻을 올린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프로를 폐지해야 한다면 도대체 그토록 많은 비판과 의혹을 사고 있는 가요순위 프로그램은 왜 ‘사수’하고 있는 것일까.
이들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너무 높아서? ‘음악캠프’(MBC) ‘뮤직뱅크’(KBS) ‘인기가요’(SBS) 등 각 방송사 가요순위 프로그램의 평균 시청률은 10∼15%. 주말 버라이어티쇼 프로의 시청률이 20∼25%인 점을 감안하면 그리 높은 편도 아니다. 그렇다면 청소년 시청자들이 간절히 바라고 있는 프로그램이어서? 최근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이 가요순위 프로그램의 존폐 여부를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했을 때, 결과는 ‘유지해야 한다’가 52%, ‘폐지해야 한다’가 48% 였다. 이 사이트의 주 이용층이 10∼20대의 젊은층임을 상기한다면 이들 역시 가요순위 프로그램에 대해 상당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해부터 들끓기 시작한 가요순위 프로그램 존폐 논쟁은 해를 넘기고도 식을 줄 모른다.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문화연대)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한국민족음악인협회,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딴따라딴지(인터넷 신문 ‘딴지일보’의 음악섹션), 대중음악판바꾸기위원회, 태지매니아(서태지 팬클럽) 등의 단체와 함께 ‘한국대중음악개혁을위한연대모임’을 결성하고 가요순위 프로그램 폐지와 대중음악 시장 개혁을 위한 본격적인 시민운동을 벌여나가기로 했다. 게다가 국회 문화관광위 소속 여야 의원들도 이 운동에 동참해 그야말로 ‘판’이 커졌다.
“상업성만 키워 한국음악 위기”
문화연대는 3월12일 발표한 선언문을 통해 “한국 대중음악이 문화적 인프라 없는 상업시장만의 성장으로 음악의 질적 하락 등 위기를 겪고 있다”면서 “막강한 매체 영향력을 갖고 이런 현상을 부추기는 방송사의 가요순위 프로를 폐지하고 공연문화 활성화, 음반유통구조 개선 등을 통해 대중음악의 장기적인 발전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지난 2월에는 국회에서 가요순위 프로 폐지 관련 공청회가 열렸고, 각종 인터넷 사이트를 통한 온라인 서명운동과 거리 서명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또한 3월 말부터 록그룹 ‘블랙홀’의 전국 순회공연(상자기사 참조)이 시작되고, 5∼6월에는 시민운동에 동참하는 대중음악인들과 함께 대규모 라이브 공연무대를 마련할 계획. 시민단체와 정치권이 공조체제를 갖춘 것도 이채롭지만, 서태지 팬클럽 등 ‘팬덤’현상을 주도하는 대중음악 마니아들이 순위 프로 폐지를 요구하며 운동에 적극 동참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태지매니아 우승민 대표는 “방송국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서태지의 경우, 지난해에 100만 장 가까운 음반이 팔렸지만 KBS와 SBS의 순위 프로에 오르지 못하는 불공정성을 보였다”면서 “실력 있는 뮤지션들의 설자리를 뺏고, 음악 소비자들의 들을 권리를 침해하는 불공정한 순위 프로의 폐지를 위해 거리 서명운동과 대학가 대자보 붙이기 운동 등을 벌여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소비자들의 ‘들을 권리’ 침해
아직 소수이긴 하지만 HOT, god 등 인기가수들의 10대 팬들 사이에서도 이 운동에 동참하려는 움직임이 조심스레 일고 있다. ‘순위에서 밀려나면 잊히고 마는 지금의 방송이 결국 가수들도 희생양으로 만들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 ‘대중음악판바꾸기위원회’의 백영상씨는 “현재의 TV권력은 음악판 전체를 짓누르고 있다. 일정한 틀을 만들어놓고 적응을 강요하는 형국”이라고 지적한다.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순위프로 폐지 요구에도 아직 방송3사의 반응은 미적지근하다. 2월 공청회에 참석한 KBS 박해선CP는 “대중음악의 위기를 가요순위 프로에만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댄스음악의 유일한 출구로서 가요순위 프로그램에 대한 시각을 달리할 것을 주문했다. MBC 예능국의 장태영 부장은 “중장년층 팬을 위한 가요프로그램도 엄연히 존재한다. 공정성 확보를 위한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기꺼이 수용하겠지만 폐지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말로 프로그램을 현행대로 계속 유지할 것임을 시사했다.
진-선-미로 줄 세워 최고 미인을 뽑는 미인대회 중계는 사라졌지만, 우리 가요의 ‘줄 세우기’를 둘러싼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전망이다.
< 신을진 기자 happyend@donga.com >
-주간동아 27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