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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리뷰]실직가장, 아 고달픈 삶이여!

입력 | 2001-04-02 18:54:00


‘행복한 가족계획’은 한국에도 SBS를 통해 프로그램 포맷이 수입됐던 일본의 인기 TV프로그램의 이름이다.

일본 TBS에서 8년간 인기리에 방영 중인 이 프로그램은 대표적 가족참여 프로그램. 방송사는 300만엔(3000만원) 한도에서 한 가족의 소원을 들어준다. 단 아버지가 방송사측에서 제시한 과제를 정확히 1주일 후에 푸는 경우에 한한다.

애완견 이름을 달달 외우거나 제한된 시간 동안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고 공 튀기기 등 과제는 만만한 것이 없다. TV에는 아버지가 과제를 풀 수 있도록 온 가족이 일치단결해 돕는 내용도 함께 방영된다.

하지만 과연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 동안에 그 화목한 가족들에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베 츠토무 감독(44)은 바로 이 점에 착안해 TV에 비치지 않는 모습을 영화로 보여준다.

식품회사 영업사원으로 성실하게 일하던 가와지리(미우라 토모카즈)는 어느날 일방적인 해고 통고를 받는다. 회사에서 내준 사택에서도 쫓겨나 처갓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면서 그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다.

아내 유코(와타나베 에리코)는 도시락 가게를 열어 직접 돈벌이에 나서면서 남편을 노골적으로 구박한다. 학교에서 이지메(집단 따돌림)를 당하면서 해외유학을 꿈꾸던 중학생 큰딸 요코는 절망하고 초등학생인 외아들 유타로도 운동신경 무딘 아버지를 닮은 탓에 야구부에도 못들어간다고 원망한다.

가진 재주라곤 성실성 밖에 없던 가와지리는 묵묵히 아내 대신 집안일을 돌보고 멍투성이가 되면서까지 아들의 야구연습을 돕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면박 뿐이다. 게다가 재기를 위해 직장상사의 사업에 투자하려던 퇴직금 200만엔도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 버린다.

고립무원의 신세가 된 그에게 ‘행복한 가족계획’의 출연 제의가 들어온다. 과제는 가족 중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1주일만에 ‘즐거운 우리집’을 한 음정도 틀리지 않고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

일본의 오랜 경제불황 속에서 상처받고 고뇌하는 ‘회사 인간’의 모습이 블랙 유머로 그려진다. 사택에서 쫓겨나는 길에 ‘회사를 위해 이 한 목숨 받쳐왔네’라는 엔카가 흘러나올 때 움찔하는 정도로 밖에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가와지리나, 같은 신세이면서도 아들과 몸싸움까지 벌여가며 억지로 가장의 위신을 세우려는 회사동료 히로세나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가와지리가 자신을 구박하는 아내를 업고 “당신 많이 가벼워졌네”라며 걸어가는 밤길 장면에 깔리는 애수가 찡하다.

아베 감독은 일본영화계 최장기 코미디 시리즈물로 꼽히는 ‘남자는 괴로워’의 야마도 요지 감독의 조감독출신. 7일 개봉. 전체 연령 관람가.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