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중순 창발성(創發性)이란 용어를 놓고 한완상 교육인적자원부장관과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 사이에 한바탕 티격태격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한 장관이 취임 직후 창발성을 교육의 주요 목표로 제시한 데 대해 교총측이 이 용어는 북한 헌법이나 노동당 규약에 널리 쓰이는 것이므로 대통령 업무보고 자료에서 삭제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불시에 솟아나는 특성▼
흰개미는 역할에 따라 여왕개미 수캐미 병정개미 일개미로 발육해 수만마리씩 큰 집단을 이루고 살면서 질서 있는 사회를 형성한다. 흰개미는 흙이나 나무를 침으로 뭉쳐서 집을 짓는다. 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버섯흰개미는 높이가 4m나 되는 탑 모양의 둥지를 만들 정도이다. 이 집에는 온도를 조절하는 정교한 냉난방 장치가 있으며, 애벌레에게 먹일 버섯을 기르는 방까지 갖추고 있다.
개개의 개미는 집을 지을 만한 지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흰개미의 집합체는 역할이 서로 다른 개미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거대한 탑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처럼 하위계층(구성 요소)에는 없는 특성이나 행동이 상위계층(전체 구조)에서 자발적으로 돌연히 출현하는 현상을 창발성이라고 한다. 창발성을 영어로는 '불시에 솟아나는 특성'(emergent property) 또는 이머전스(emergence)라고 한다.
창발성은 국내 학계에서 오래 전부터 사용된 용어이다. 가령 마음을 연구하는 인지과학의 경우 12명의 학자가 펴낸 인지과학 (1989년)에 신경세포의 집합체인 뇌에서 마음이 출현하는 현상을 창발성으로 설명하는 글이 실려 있다. 또한 여러 교수가 함께 집필한 현대생태학 (1993년)에는 창발성 원리가 생태학의 기본 개념으로 소개돼 있다. 예컨대 숲을 이해하려면 나무 하나 하나에 대한 지식 뿐만 아니라 완전한 기능을 갖춘 삼림의 특성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머전스는 복잡성 과학의 기본 주제이기 때문에 21세기 과학의 대표적인 키워드가 되고 있다. 복잡성 과학의 연구 대상은 사람의 뇌나 생태계 같은 자연현상, 주식시장이나 세계경제 같은 사회현상이다. 이들은 단순한 구성요소가 수많은 방식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복잡계라고 불린다. 사람의 뇌는 수백억 개의 신경세포가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으며 증권시장은 수많은 투자자들로 들끊고 있다.
복잡계의 행동은 언뜻 보아서는 무질서해 보인다. 그러나 복잡계는 혼돈 대신에 질서를 형성해낸다. 혼돈과 질서의 균형을 잡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복잡계는 단순한 구성요소가 상호간에 끊임없는 적응과 경쟁을 통해 질서와 혼돈이 균형을 이루는 경계면에서, 완전히 고정된 상태나 완전히 무질서한 상태에 빠지지 않고 항상 보다 높은 수준의 새로운 질서를 형성해낸다. 예컨대 단백질 분자는 생명체를, 기업이나 소비자는 국가 경제를 형성한다.
단백질 분자는 살이 있지 않지만 그들의 집합체인 생물은 살아 있다. 요컨대 생명이란 하위계층인 단백질에는 없지만 상위계층인 생물체에서 창발하는 현상이다.
복잡성 과학이 주목받는 까닭은 거의 모든 자연세계와 사회현상이 복잡계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의 뇌나 생태계에서 창발성이 나타나는 원리를 밝혀내려는 복잡성 과학에 거는 기대가 상상 외로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복잡성 과학은 현대과학의 접근방법에 일대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교육목표 삼기엔 부적절▼
지난 3세기 동안 서양과학은 환원주의에 의존했다. 사물을 간단한 구성요소로 나누어 이해하면, 그것들을 종합해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복잡성 과학의 이머전스 개념은 전체가 그 부분들을 합쳐놓은 것보다 항상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복잡계는 환원주의의 분석적인 틀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사물을 구성요소의 합계가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전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전일주의(全一主義)가 부상하게 된 것이다.
창발성의 개념에 비춰볼 때 한 장관의 해명처럼 콜럼버스적인 발상 같은 창조적 발상을 교육 목표로 삼기 위해 창발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무래도 적절치 못했던 것 같다.
이인식(과학문화연구소장)